[3ㆍ1운동.임정 百주년](41) 위풍당당했던 상하이임정 '1호청사'
프랑스조계 중심 2층 양옥에 태극기 내걸어…현재는 패션 거리 변모
임정 수립 결정한 임시의정원 첫 회의 장소 아직도 확인 안 돼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의 심장 역할을 했던 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시 한복판의 유서 깊은 거리인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에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프랑스 당국이 직접 관리하던 조계지였던 이 거리 곳곳에는 아직도 많은 서양 양식의 건축물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보전돼 있다.
중국어로 된 간판과 유럽풍 건물의 공존이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거리다.
대형 쇼핑몰과 나이키, H&M 같은 글로벌 브랜드 점포들이 즐비한 이곳은 늘 인파로 넘실대는 패션 거리로 변모한 지 오래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100년 전 가장 위풍당당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호 청사'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분출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바탕으로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4월 10일 밤 10시 첫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한다.
이튿날 오전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고,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조직이 꾸려진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임시정부는 집무를 볼 번듯한 청사를 갖출 형편이 못 됐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꾸려지긴 했으나 국내에서 한성 임시정부, 러시아에서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각각 별도로 꾸려진 상황에서 온전한 정통성을 인정받은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임시정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질 내무총장으로 임명된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입국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활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안창호 선생의 합류로 임정은 비로소 안정된 업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까지 임시정부는 임정 요인이나 한인들의 집 등을 돌며 회의를 여는 등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안창호 선생은 그해 8월께 미국 교민들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프랑스 조계지의 중심거리의 2층짜리 양옥 저택을 세냈고, 이곳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의 주소는 샤페이루(하비로·霞飛路) 321호로 확인된다. 현주소로는 화이하이중루 651호 일대다.
연합뉴스가 상하이시 당안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역사학자 쉬훙신(許洪新)씨로부터 제공받은 1920년 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의 지도를 보면, '하비로 청사'는 현재도 옛 모습을 간직한 쑨원(孫文·1866∼1925)의 집무 건물의 대로 맞은편에 있었다. 정확히는 현재 리복 매장 건물과 H&M 매장 건물의 가운데 자리였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는 '하비로 청사' 건물이 훗날 헐리면서 해당 필지가 현재 두 개의 건물에 반씩 나뉘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건물은 현재 사라졌지만 2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첨부된 사진을 통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비로 청사'는 앞에 넓은 잔디밭이 딸린 웅장한 2층 석조 건물이었다. 건물 우측 바깥에 내걸린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이 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곳을 청사로 사용하던 시절은 임시정부의 역사에 있어서도 특히 중요한 때로 기록된다.
1919년 9월 '하비로 청사'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간의 통합 회의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 임시정부는 비로소 전 민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하비로 청사' 사용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프랑스 조계 당국은 그해 10월 강제 폐쇄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중국 신문들은 프랑스 조계 당국이 임시정부 측에 48시간 안에 건물을 비울 것을 통보했다면서 일본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10차례 이상 개인 집이나 한인 단체 사무실 등을 전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1926년에야 현재 임시정부 기념관이 남아 있는 푸칭리(普慶里·보경리) 4호의 건물을 얻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가 있던 1932년까지 사용하게 된다.
윤 의사의 의거 이후 당시 상하이까지 점령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면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 창사(長沙), 류저우(柳州), 충칭(重慶) 등지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하비로 청사'를 임시정부의 '1호 청사'로 의미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보인다.
독립운동사 연구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하비로 청사는 임시정부가 훗날에도 유일하게 떳떳한 청사 건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던 곳"이라며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상하이서 수립됐지만 그전에는 안정적인 청사가 마련됐다고 보기 어렵고, 실질적으로는 안창호 선생이 내무총장으로 부임해 업무를 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하비로 청사를 '1호 청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쑨커즈 교수도 "일각에서는 1919년 4월 11월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건물을 임정의 '1호 청사'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근대 국가에서 의회와 정부 조직은 별개로 볼 필요가 있다"며 "임시정부는 훗날 하비로 청사 건물 사진으로 대외 선전용 엽서를 만드는 등 임정 요인들에게 이 건물은 독립의 희망을 품은 장정의 출발지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했다.
한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1차 임시의정원 회의 개최 장소 확인은 아직 우리 학계에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앞서 일부 역사학자들이 임정의 활동을 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섰던 현순 목사의 거처였던 옛 진선푸루(金神父路·김신부로) 22호가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장소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밝힌 적도 있다.
하지만 한시준 교수 등 다른 역사학자들은 해공 신익희 자서전 기록 등을 토대로 1차 임시의정원 회의 개최 장소가 진선푸루 22호가 아닌 진선푸루 60호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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