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절차 축소·변형…고종 장례는 어떻게 진행됐나(종합)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묘시(卯時)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다음날 복(復)을 행하였다."
순종실록은 1919년 1월 21일 기사에서 조선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에 오른 고종(1852∼1919)의 죽음을 이렇게 짤막하게 다뤘다.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삼은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고종은 뇌내출혈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항간에는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독살됐다는 이야기가 급속하게 퍼졌다.
그해 3월 3일 발인을 보려고 상경한 사람은 40만 명에 달했으며, 국장에 관한 기사가 끊임없이 보도됐다. 고종 승하는 일제에 억눌려 살아온 민중을 자극했고, 3·1운동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음 달 1일부터 31일까지 1층 전시실에서 소규모 기획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을 연다.
28일 간담회에서 장진아 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고종 황제 장례는 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葬儀掛)가 주도했고, 기간도 대폭 단축됐다"며 "일본 친왕(親王)의 국장을 기본으로 조선의 옛 관습을 더한다는 원칙을 정해 신도(新道)식 의례를 적용했다"고 말했다.
고종의 승하, 국장, 영면이라는 세 가지 소주제로 구성한 이번 전시에는 고종 초상화, 국장 당시 제작한 각종 기록과 사진, 고종 승하 이후 존호를 올리며 만든 옥보와 옥책 등 자료 15건을 선보인다.
국장 절차를 기록한 '고종태황제어장주감의궤'(高宗太皇帝御葬主監儀軌)와 국장에서 의장 행렬을 담당한 민간단체가 남긴 '덕수궁인산봉도회등록'(德壽宮因山奉悼會謄錄)을 보면 장례가 일본식으로 진행돼 절차가 축소되고 변형됐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 국왕은 승하 후 발인까지 약 5개월이 걸렸으나, 고종은 40일이 소요됐다. 고종 국장에서 제사 주체는 후계자가 아닌 제관장이었고, 본래 70단계인 절차는 20단계로 축소됐다.
관리 복장은 상복, 연미복, 일본식 의복이 섞였고, 일본 신사에 배치하는 나무인 '사카키'가 중심 의장(儀仗)으로 사용됐다.
전시는 고종이 묻힌 남양주 홍릉과 다른 조선왕릉의 능제(陵制) 차이점도 소개한다.
홍릉은 조선왕릉과 비교해 영역이 축소됐으나, 전각 명칭과 석물 종류 등 제도는 황제릉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석물이 형식적이고 투박하며, 국장 진행 중 예법에 어긋나는 절차가 일어나기도 했다.
박물관은 전시와 연계해 내달 21일 '고종 국장과 1919년의 사회'를 주제로 특별 강연회를 연다.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은 고종 국장 과정을 분석해 대한제국 황실 의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하고,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국장 이후 민심이 폭발하면서 3·1운동이 발생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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