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흥망성쇠 흔적 '창녕 계성 고분군' 사적 됐다

입력 2019-02-26 10:54
가야 흥망성쇠 흔적 '창녕 계성 고분군' 사적 됐다

경주 분황사지·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도 각각 사적 지정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남 창녕 지역 가야 세력의 흥망성쇠를 뚜렷이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인 '창녕 계성 고분군'이 경남기념물에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됐다.

문화재청은 창녕 남부 영축산 서쪽 경사면에 조성한 삼국시대 고분 261기를 묶은 창녕 계성 고분군과 신라 유적인 '경주 분황사지', '경주 구황동 원지(園池) 유적 일원'을 각각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를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현 정부가 가야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기는, 작년 3월 호남 지역 가야 유적 중 최초로 사적이 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에 이어 두 번째다.

사적 제547호 창녕 계성 고분군은 1917년 고분 분포도를 처음 작성한 뒤 다섯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를 통해 5세기에 축조한 대형 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구덩식 돌덧널무덤)와 6∼7세기에 축조한 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墓·앞트기식 돌방무덤)가 모두 확인됐다. 이러한 무덤 양식 변화는 고분군 서쪽에서 동쪽 순으로 나타났다.



출토 유물은 금동관 조각,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와 발걸이, 말안장 꾸미개 같은 마구(馬具), 무구(武具), 뚜껑이 있는 고배(高杯·굽다리접시),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그릇받침) 등이다.

전문가들은 조사 보고서에서 "사적 제514호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는 대형 고분이 많지만, 계성 고분군은 구릉 정상부에 지름 30m가 넘는 대형 고분 5기를 중심으로 중형과 소형 고분이 섞여 있다"며 "계성 고분군이 가야의 고분 축조 전통을 간직했다면,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정치 엘리트 중심 묘역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한 사찰로, 신라 승려 자장과 원효가 머물며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한다. 황룡사, 흥륜사와 함께 삼국통일 이전 신라 왕경 경주에 조성한 칠처가람(七處伽藍) 가운데 하나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한 절터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최초의 품(品)자 형태 일탑삼금당(一塔三金當·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양식) 양식으로 건설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 차례 중건을 거쳐 조선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 금당인 보광전을 지었다.

특히 사찰 창건 당시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이 유명하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올린 탑으로, 지금은 3층만 남았다.

분황사지와 담장을 사이에 둔 구황동 원지 유적은 분황사에 속한 사원지(寺園池)로 판단되기도 했으나, 주로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발견돼 별개 유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명됐다.

구황동 원지 유적은 1999년 황룡사 전시관 건립 부지로 선정돼 시굴조사하던 중 통일신라시대 석축(石築), 담장, 우물이 확인됐다.

연못에 크기가 다른 인공섬 두 개를 배치하고, 주변에 입수로·배수로·건물터·담장·축대를 만들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분황사지는 체계적 발굴로 건물 배치 양상과 변화상, 경역(境域) 대부분을 파악한 사찰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며 "구황동 원지는 동궁과 월지, 용강동 원지에 이어 조성 연대와 규모, 내부 구조가 대부분 드러난 세 번째 신라 왕경 원지 유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조경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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