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3·1운동의 숨은 조력자…외국인 의인들
(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대한 독립 만세!'의 물결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태평양 건너 미주까지 퍼져 나갔다. 민족 대표 33인을 비롯한 깨어 있는 한국인들이 자주적으로 일치단결해 벌인 의거지만 이방인 독립운동가들의 도움도 있었다.
캐나다 출신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石虎弼)는 '34번째 민족 대표'로 불린다. 민족 대표들이 비밀리에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외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이던 그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이자 세브란스병원 제약 주임인 민족 대표 이갑성에게 해외 정세를 담은 외국 신문을 전해주었다.
스코필드는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알리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배포하고 국내외 영어신문에 독립 선언의 취지를 알리는 글을 실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를 찾아 수감자들의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만나 항의하기도 했다. 그해 4월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와 향남면 제암리 등에서 학살극이 벌어지자 보고서를 작성해 해외에 보냈다.
1920년 강제 출국당한 뒤로도 기고와 서한 등으로 일제를 규탄하고 조선인을 격려했다. 1958년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용돼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고아들을 돌보고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도 앞장섰다. 해마다 3·1절에 주요 신문에 기고하며 3·1정신의 부활을 일깨우기도 했다. 정부는 문화훈장과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한 데 이어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화성시는 25일부터 3월 28일까지 SRT 동탄역 지하 4층 로비에서 '프랭크 스코필드 특별전'을 열어 제암리 학살 현장의 사진, 보고서, 신문기사 등을 선보이고 있다.
로버트 그리어슨(한국명 구예선·具禮善)도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다. 함경북도 성진에 보신학교·협신중학교와 제동병원 등을 세우고 애국 계몽운동과 의료 선교에 힘썼다. 서울에서 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자 집과 병원을 애국지사들의 본부로 내줬다. 3월 10일 학생과 교회 신도들은 보신학교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일본 경찰이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리어슨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돌봤다.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됐다.
서울시와 주한 캐나다대사관은 스코필드와 그리어슨 등 독립운동을 도운 캐나다인 5명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23일부터 3월 23일까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1층 시티갤러리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이라는 이름의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이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취재하고 영국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한 프레더릭 매켄지(독립장) ▲중국 지린(吉林)성 제창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시위 부상자를 치료하고 이듬해 일제의 경신참변 학살을 폭로한 스탠리 마틴(독립장) ▲ 만주의 명신여학교와 은진중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여성 교육 등에 힘쓰고 경신참변을 해외에 알린 아치볼드 바커(독립장)의 유품과 기록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출신의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 당시 뉴스통신사 UPI의 전신인 UPA의 서울 특파원이었다. 그는 기미독립선언문 사본을 입수해 전 세계에 타전했다. 제암리 학살사건도 취재해 외신 기사로 보도했고, 스코필드·언더우드 등과 함께 조선 총독을 찾아가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했다.
그가 서울 종로구 행촌동 권율 장군 집터에 지어 살던 집 '딜쿠샤'(힌디어로 이상향을 뜻함)는 피난민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살며 방치됐으나 2016년 문화재로 지정돼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서양인 독립유공자들의 발자취를 소개하는 기념관으로 꾸며 2020년 문을 열 계획이다.
이에 앞서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해 11월 23일부터 오는 3월 10일까지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를 열고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기증한 조부의 유품과 딜쿠샤의 생활용품 등 1천26점 가운데 310점이 전시 중이다.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현장을 3·1절 오후 2시부터 4시 20분까지 처음으로 시민에게 공개한다.
미국인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印敦)은 군산 영명학교 교장 시절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그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서는 3·1운동의 실상을 보고했다. 애틀랜타신문에도 비폭력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독립 염원을 알리는 글을 기고했다.
영명학교는 3·1운동 후 한강 이남에서 처음 벌어진 3·5 군산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 군산시는 영명학교가 있던 구암동산을 3·1운동 역사공원으로 꾸미고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세워 당시 영명학교 건물 모형도 전시해놓았다. 린튼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그의 손자 인세빈과 인요한은 현재 유진벨재단 회장과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을 각각 맡아 북한 돕기와 의료 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이 땅에 개신교 선교의 씨앗을 뿌린 미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元杜尤)의 집안도 린튼 가문과 함께 누대에 걸쳐 교육과 의료 봉사에 힘써 이주민의 롤 모델로 꼽힌다. 그랜트 언더우드의 장남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元漢慶)는 연희전문학교 교수 시절 3·1운동에 이어 제암리 학살이 자행되자 세계 교회와 언론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항일 투쟁과 국민 계몽에 앞장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서양인'이란 별칭을 얻은 호머 헐버트(한국명 할보·轄甫)는 3·1운동 당시 미국에 있었으나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글을 발표하며 한국을 향한 뜨거운 애정을 과시했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들은 외국인이어서 신분을 보호받았고 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미국·캐나다 정부나 개신교단 선교본부들은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말도록 압력을 넣었다. 33인의 한 명인 이갑성도 "당시 외국인 선교사 거의 전부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꺼렸다"고 회고했다.
일제의 감시와 본국의 압력을 무릅쓴 이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의로운 행동이 있었기에 독립·평등·평화라는 3·1정신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일제의 만행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3·1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의 대동단결과 한반도 평화를 이루고 피압박 민족과 저개발국 국민의 인권을 위해 힘쓰는 것이 서양인 의인들의 유지를 받드는 일일 것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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