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1919]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지

입력 2019-03-10 08:01
[시간여행 1919]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지

(군산=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이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선언식은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며 끝났다.

오후 2시 30분경 탑골공원에서는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남녀 학생 4천∼5천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행진에 나섰다. 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됐다.

이날 서울을 비롯해 평안남도 평양·진남포·안주, 평안북도 선천·의주, 함경남도 원산 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경기도 개성, 충청남도 예산, 전라북도 옥구, 경상북도 대구, 전라남도 광주 등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치열한 항쟁과 무서운 탄압이 있었던 군산, 천안, 화성의 1919년을 돌아봤다.



전북 군산은 대표적인 근대 역사 여행지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 부르는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있고, 수탈의 상징인 뜬다리 부두와 창고에, 일본식 사찰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지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100년 전 3월 5일 이곳에서는 독립을 향한 뜨거운 함성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군산은 왜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었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후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군산이 개항했다.

금강 하구에 있는 이곳은 인근 평야에서 생산한 양곡을 수송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더구나 군산 일대 땅은 비옥하고 땅값은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일본인에게 군산은 황금의 땅이었다. 일본인들은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이고 쌀농사를 지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군산의 인구는 한국인이 6천581명, 일본인이 6천809명, 그외 외국인이 214명이었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228명 많았다.

일본인은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으로 우리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청년들은 부두에서 등짐을 지고, 부녀자들은 정미소에서 쌀을 골라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서재순 문화관광해설사는 "부(富)를 쫓아온 일본인이 많이 정착했던 군산은 어느 지역보다 일제의 수탈이 심했다"며 "한강 이남에서 독립을 위해 만세를 가장 먼저 부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 사그라든 불씨 살린 교사와 학생들

1919년 군산의 만세운동을 살펴보려면 우선 일제 수탈의 상징인 뜬다리 부두에서 동쪽으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구암동산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올라서면 속살을 드러낸 뻘밭 뒤로 서쪽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금강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이 바로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발원지는 근대식 교육기관인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중고)였다.

독립선언서가 영명학교에 전달된 것은 2월 28일. 영명학교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병수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장을 건네받고 군산에 내려와 서울의 독립운동 준비 상황을 은사인 박연세, 이두열 등에게 알린 것이다.

거사일은 3월 6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래 장날로 정했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과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7천여장을 등사했고, 멜본딘여학교 학생들은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망은 피할 수 없었다. 거사 하루 전인 3월 5일 오전 일본 경찰 10여 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를 급습했다.

학생들이 총구를 향해 옷을 풀어헤치며 저항했지만 숨겨둔 태극기와 만세운동 관련 문서가 발각됐고, 결국 교사 박연세, 이두열 등의 주모자가 연행됐다.

교사들의 연행으로 자칫 거사가 수포가 될 상황. 교사 김윤실은 교사와 학생들을 소집해 긴급회의를 가졌고 하루 앞당겨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인근 예수병원 직원과 교사 20여 명, 학생 100여 명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들고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운동 참가 인원은 서래장터를 지나며 500여 명으로 늘었고, 급기야 1천여 명으로 불어난 만세 행렬은 두 교사가 연행된 군산경찰서까지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시위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총격을 가하며 진압에 나섰고, 3월 8일까지 90여 명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63명이 구속됐다.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3월 23일 일본인 교장이 관리하던 군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학생 70여 명이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한 것에 대해 교장이 설득과 협박, 회유로 학부형과 학생들의 마음을 돌리자 정미소 청년 노동자 이남율, 김수남 등이 군산공립보통학교를 친일적이고 독립운동에 저해되는 학교로 규정하고 교사를 불태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와 학생들이 무더기로 검거되고 고문을 받았다.

일주일 후인 30일에는 군산법원 앞에서 야간시위가 진행됐다. 만세운동 관련자 공판을 앞두고 주민 수백 명이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튿날 군산법원에서는 체포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30여 명이 재판장에 들어선 순간 방청객들이 만세를 외쳤고, 만세를 외친 이들은 모두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5월까지 총 28회 열린 만세 시위에는 3만700명이 참가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됐다. 3·5만세운동의 여파는 전주, 광주, 목포 등으로 전파되며 저항 운동을 이어가게 했다.



◇ "동지들을 위해 절대 굽혀서는 안 된다"

구암동산에는 현재 군산3·1운동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역사공원 입구에 있는 세풍아파트 단지가 바로 영명학교 터다.

역사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언제 들어도 울림을 주는 글귀가 방문객을 맞는다.

비탈을 오르면 한동안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된 옛 구암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고딕 양식의 회색빛 건물이다.

이 교회는 구암동산에 영명학교와 예수병원을 설립한 윌리엄 전킨 선교사가 1893년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59년 지은 것이다.

비탈을 따라가면 전킨 선교사, 구암교회, 만세 운동 관련 벽화가 이어진다. 호남선교기념예배당 옆으로는 군산3·1운동기념비와 호남선교100주년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아래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새겨져 있다. 옛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예수병원의 모습이 담긴 벽화도 볼 수 있다.

'대한독립만세'가 새겨진 조형물 뒤편으로 드디어 지난해 6월 개관한 '군산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산 3·5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옛 영명학교의 모습을 본떠 지은 3층 벽돌건물이다.

1층 추모기록실에는 1900년대 군산의 상황, 3·1운동과 3·5만세운동,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구암교회, 근대교육과 선교사 등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추모의 벽에는 3·5만세운동에 참여해 고초를 겪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쪽에는 3·5만세운동의 경과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2층은 역사재현실로 김병수의 독립선언서 전달, 교사들의 강제연행, 재판과정, 군산공립보통학교 방화사건 등을 엿볼 수 있다.

1918년 선포된 최초의 독립선언서 사본, 동대문 만세 시위 사진, 태극기 목판, 옛 군산경찰서 사진도 볼 수 있다.

재판정으로 꾸며진 곳에서는 교사 박연세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사랑하는 교인들과 가족들, 이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 절대 굽혀서는 안 된다.(중략) 주여, 이 믿음이 헛되지 않기를 도와주소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 하여금 독립을 부르짖게 하소서."

한쪽에는 영명학교 교사 출신으로 4월 4일 이리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칼에 찔려 순국한 문용기의 피 묻은 흰색 두루마기 복제본이 전시돼 있다.

문용기는 일본 경찰이 오른팔을 베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고, 다시 왼팔을 베자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부르다 난자를 당했다고 한다.

3층은 체험교육관으로 태극기 만들기, 태극기 목판 인쇄, 태극기 미로 체험, 만세운동 전파하기 등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다. 두루마기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기념관 뒤편에 태극기가 그려진 계단을 오르면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 발상지'를 알리는 조형물이 서 있다.



◇ 일제강점기 풍경 속을 걷다

구암동산을 둘러본 후 근대역사지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간여행마을'이라 불리는 곳답게 일제강점기 풍경이 곳곳에서 눈앞에 나타난다. 만세운동 당시 이곳 거리 곳곳에는 태극기를 든 주민과 만세의 함성이 가득했을 것이다.

뜬다리 부두(부잔교)와 인근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한 통로였다. 즉 한반도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1934년 전국에서 생산된 쌀 1천630만석 중 절반이 넘는 870만석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다.

부두 바로 뒤편에는 쌀 선적을 쉽게 하기 위한 군산항역이 있었고, 주변 창고 안팎에는 쌀가마니가 가득했다. 1926년에는 군산항 제3차 축항 기공 기념으로 쌀가마니로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을 쌓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고 말린 콩 껍질로 죽을 끓여 먹으며 삶을 영위하던 조선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쌀을 실은 기차가 다니던 철길에는 지금 레일바이크 '시간 여행 꼬마 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부두 뒤편에는 세관, 은행, 무역회사, 미두장이 들어섰고, 그 남쪽엔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다. 지금 관광객이 주로 찾는 근대역사지구는 당시 일본인의 활동 무대였다. 일본인 거주지가 만들어지면서 조선인은 터전을 잃고 쫓겨나 산등성이에 토막집(토담집, 땅을 파고 가마니로 지붕을 만든 형태의 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1908년 건축된 군산세관은 현재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벨기에에서 수입했다는 붉은 벽돌이 유난히 산뜻해 보인다.

바로 옆에는 군산의 역사를 알아보고, 일제강점기 군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옆에는 장미(藏米)갤러리가 있다. 과거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해방 후 이 건물은 위락시설로 사용됐다. 지금은 체험학습과 예술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옆에 무역회사로 사용됐던 건물은 카페, 근대문학 소통 공간으로 변신했다.

몇 발자국 옆으로 떼면 지금은 근대미술관으로 이용되는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이달 말까지 '시간을 담아낸 향기'를 주제로 소장품전이 열린다.

미술관 뒷문을 열면 안중근 의사 관련 전시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안 의사가 수감 생활한 뤼순감옥을 재현한 공간, 안 의사 어머니가 쓴 편지 등을 볼 수 있다. 이곳 벽에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문구가 있다.

근대미술관 옆에 있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근대건축관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선 군산에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의 모형과 군산경찰서, 상공회의소, 형무소 등 옛 건축물의 사진을 볼 수 있다.

해망로를 건너 남쪽으로 향하면 옛 일본인 거주지다. 창문과 문이 번갈아 나타나는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가 생활한 신흥동 일본식 가옥과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이곳에 있다.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승려가 지은 금강선사로부터 시작됐다. 1913년에는 대웅전이 들어섰다. 경내에는 1919년 교토에서 제작된 범종이 있고, 2015년 군산시민과 일본인이 성금을 모아 만든 군산평화소녀상,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가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것을 참회하는 참사비가 있다.

인근에는 한석규·심은하 주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로 유명한 초원사진관과 테디베어뮤지엄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의 야채빵과 단팥빵, 최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매운 잡채, 국물맛 시원한 칼국수, 생선구이와 오삼불고기도 이 거리에서 맛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복원해 다다미를 깐 숙박시설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이색 체험이 될 것 같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