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36) 백범, 피신처 찾아 삼남 유랑

입력 2019-02-27 06:00
수정 2019-02-27 06:36
[3ㆍ1운동.임정 百주년](36) 백범, 피신처 찾아 삼남 유랑

日人 살해후 탈옥, 전남 보성 쇠실마을·경북 김천 월곡마을·충남 공주 마곡사 잠행

김구 거쳐 간 곳 명상길·기념관 조성…추모 제례 등 다양한 사업도



(보성·김천·공주=연합뉴스) 한무선 김준호 장아름 기자 =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된다. 조선의 한 청년은 5개월여 뒤인 1896년 3월 9일 오전 3시께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한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일으킨 백범 김구 선생의 치하포 사건이다.

스치다를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육군 중위로 판단한 선생은 그를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선생은 그해 6월 말 해주부에서 체포된다.

21살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 감리서(監理署)에서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8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처지에 놓인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극적 반전이 일어난다.

고종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처단했다'는 조사 내용을 보고받고 사형집행 중지를 명령한 것이다.

감리서에서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898년 3월 19일 4명의 죄수와 함께 탈옥을 감행했다.

선생은 피신할만한 곳을 찾아 충청·전라·경상 등 삼남 지방을 유랑하며, 일본 헌병들을 피해다니는 생활을 이어간다.





김구 선생이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1898년 음력 5월이다.

지금은 전남 신안에서 부산 가는 방향으로 국도 2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산등성이 너머로 마을이 보이지만 과거에는 깊은 골짜기에 있어 좀처럼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쇠실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 선생은 마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던 김광언씨 집에 40일 넘게 은신했다.

선생은 마을 사람에게 자신의 구체적인 정체를 알리지 않고 "지나가는 과객인데 나도 안동 김씨 일가"라고 소개했다.



김광언씨는 먹을 것이 부족한 초여름 콩잎을 따 콩죽을 쒀서 나눠 먹으며 따뜻하게 선생을 대접했다.

선생은 동국사기 한 권을 갖고 와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국을 걱정하는 담소를 나누며 지냈다.

선생은 40일 가까이 정을 붙인 마을을 떠날 때에야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며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이별난'이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선생은 광복 후 전국을 순회하며 1946년 9월 22일 은혜를 잊지 않고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주민들은 마을 입구 도로를 닦고 솔문을 세워 선생을 환영했다.

주민들은 선생이 남긴 책과 글을 보존하며 마을 입구에 작은 안내판을 설치해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곳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광언씨 집은 1960년대에 다시 지어졌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옛 형태를 살렸다고 한다.

선생이 1946년 마을을 찾았을 때 생후 2개월 아기였던 김광언씨 후손 김태권(73)씨가 현재 '김구선생 은거의집'을 살피며 보존하고 있다.

종친이자 마을에서 한평생 산 김태식(77)씨도 2006년 건립된 '백범 김구 선생 은거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기념관에서는 지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 백범 김구 선생의 전라도 잠행 120주년을 맞아 '청년 김구의 120년 전 전라도 길'이란 주제의 전시회도 열렸다.

김태식씨는 "같은 일가고 선생의 정신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농사짓는 틈틈이 기념관을 관리해왔다"며 "한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김구 선생의 정신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전시·추모 시설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해 겨울 선생은 충남 공주 태화산 자락에 있는 마곡사가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다고 판단, 이곳에 숨어든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 집결지이기도 했다.

선생은 하은당이라 불리던 스님을 은사로 맞아 출가했으며,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수도하면서 마곡사 백련암에 몸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곡사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신분 노출 위험이 커지자 8개월가량 뒤 평양 인근 절로 거처를 옮겼다.

마곡사 경내 왼쪽에 있는 백범당은 선생이 머물던 곳으로, 현재는 선생을 기념하는 사진과 글씨 등이 전시된 홍보관 역할을 하고 있다.



마곡사 뒤편으로 200여m를 걸어가면 선생이 출가하기 위해 머리를 깎은 장소인 '삭발 바위'가 나온다.

선생은 후일 백범일지에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고 출가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공주시는 2010년 5월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곡천을 따라 '백범 명상길'을 조성했다.



선생이 한때 기거했던 토굴을 거쳐 조선 세조가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라 칭하며 감탄했던 군왕대에 이르는 총연장 3㎞ 구간이다.

광복 이후인 1946년 선생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마곡사를 찾아 심은 향나무 한 그루는 잘 자라 관광객과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시 선생은 마곡사 대광보전 주련(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을 보고 더욱 감개무량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범당에는 당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었다는 사진이 선생의 휘호와 함께 걸려 있다.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 발자취가 뒷사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마곡사는 매년 선생이 숨을 거둔 6월 26일 추모 다례제를 열어 선생을 기리고 있다.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마을도 선생과 인연이 깊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전라도 무주에서 이시발의 편지를 받고 찾아간 곳으로 언급돼 있다.

백범일지에는 이곳이 월곡이 아니라 '경상도 지례군 천곡'으로 쓰여 있는데, 월곡의 옛 지명으로 전해진다.

현재 약 90가구가 사는 월곡리에는 옛부터 절경으로 알려진 월곡 숲이 있고 백범일지에 부잣집으로 소개된 성태영의 집도 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은 "성태영이 나를 이끌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물가에서 물고기의 노는 모습을 보고, 저녁에는 등불 아래에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며 한 달여를 보냈다"고 썼다.

2009년 김천시가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할 때 월곡리에서는 김구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펼쳤다.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은 마을마다 상징적인 보물을 주민들이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 사업이었는데 월곡리에서는 김구 선생이 다녀간 사실을 보물 같은 일로 여겨 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과거 성태영이 살았으나 지금은 원형이 사라지고 다른 개인 사유지가 된 집 입구에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이 생겼다.

또 가까운 월곡숲에는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비'가 들어섰는데 비석에는 백범일지를 인용해 김구 선생이 월곡에 머물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김구 선생 은거 기념비와 표지석이 있지만 일부러 이를 보려고 찾아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며 "김천의 주요 관광지와는 많이 떨어진 외딴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아쉬워했다.

한편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월곡에 있을 때 유인무와 성태영이 그의 이름을 김구(金龜)로 지어줬다고 하나 더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나중에 이 이름이 김구(金九)로 바뀌었다.

kjun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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