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② 격렬하고 치열했던 경기 북부

입력 2019-02-21 06:00
수정 2019-02-21 09:41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② 격렬하고 치열했던 경기 북부

양주·파주·포천·구리 등 경기 북부 전역서 시위

리 단위에서 면 단위로, 면과 면의 연합 시위로 발전

구장, 주민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시위에 적극 참여

(의정부=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서울에 인접해 있어 더욱 빨랐던 경기 북부지역의 만세운동은 넓은 지역에서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3.1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과 종교계 지도자들의 선도적 투쟁에 이어 농민들이 점차 투쟁의 주체로 나섰다는 특징도 있다.

조선소요사건총계일람표(朝鮮騷擾事件總計一覽表)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난 618개 지역 중 경기도가 143개 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고, 만세운동 848회 중 225회가 경기도에서 일어났다.

◇ '치밀한 계획과 추진' 양주 만세운동

양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지역민의 동조와 호응 속에서 무장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활발한 의병 활동으로 1907년 전국의 의병 부대가 연합,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을 때 본부 지휘소와 함께 전국 의병의 집결지가 되며, 우리나라 의병 항쟁이 마지막까지 전개됐던 곳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양주에서의 만세운동 열기는 다른 지역들보다 더 뜨거울 수 밖에 없었다.

양주의 대표적 만세운동 장소는 백석면(현 백석읍)과 광적면이다.

1919년 3월 27일 밤 양주군 백석면 주민 20~30명은 연곡리 구장이던 안종규와 그의 형 안종태 주도 아래 횃불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28일에도 이들 형제는 이사범·김대현 등과 더불어 600여 명의 주민을 인솔, 오산리 대들벌로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후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만세 시위를 주도한 안종규 형제는 체포돼 같은 해 5월 23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씩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28일 광적면 효촌리의 김진성 등은 만세 시위를 벌인 후 가납리로 향했다.

가납리에서는 주민 350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헌병에 의해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백남식·김진성·이용화가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양주의 3·1 운동은 만세운동이 농촌 사회로 전파되는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세 시위의 주체는 대부분 농민이었고, 횃불 시위와 연합 시위, 무력시위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됐다.

대부분 리 단위에서 시작돼 면 단위로 발전했으며, 면과 면의 연합 시위로도 확대했다.

또 양주군 만세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준비 단계에서 발각돼 시위가 사전에 실패한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다. 거사의 계획과 추진이 치밀했음을 보여준다.

◇ '유관순 서대문형무소 동지' 임명애 파주 만세운동 주도

파주는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고, 북쪽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3·1운동 당시에도 서울의 상황이 가장 잘 전파됐다.

파주의 대표적인 만세운동 장소는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 전신)다.

1919년 3월 10일 구세군 신도 임명애는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00여 명을 독려,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임명애가 선창하자 학생들도 따라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이후 25일 김수덕·김선명이 임명애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의논하고 주민들을 모으기 위해 등사판으로 격문을 만들어 와석면 당하리 일대에 배포했다.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진 뒤 25일 임명애와 그의 남편 염규호, 김수덕, 김창실 등은 염규호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28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했지만, 실제 시위는 이틀 앞선 26일 진행했다.

26일 염규호 등은 인근 동내에서 모인 군중 700여 명을 인솔, 와석면사무소에서 시위했다.

만세 시위 이후 임명애는 체포돼 이른바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방에서 옥고를 치렀다.

염규호·김창실 등은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보통학교 학생들 주축 포천 만세운동

포천지역의 3·1 만세운동은 13일 오전 11시 포천공립보통학교(현 포천초등학교 전신)의 정수환을 비롯한 3∼4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교원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돼 주민들로 확산했다.



1919년 3월 24일 포천 소흘면 송우리에서는 600여 명의 주민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송우헌병주재소 헌병경찰들은 총검으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30일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송우헌병주재소에 몰려와 만세 시위를 재차 전개했다.

24일 시위 때 체포된 만세 시위주동자들과 29일 체포된 무봉리 만세 시위주동자들을 구출하려는 시도였다.

◇ 면서기와 주민이 합세한 구리 아천리 만세 시위

1919년 3월 28일 양주군 구리면 아천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구리면 서기인 이강덕이 주도하고, 심점봉 등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오후 5시께 아천리를 떠나 인근 토평리와 교문리까지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펼쳤다.

이튿날에도 아차산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이강덕과 심점봉은 체포돼 그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만세 시위로 구리 지역을 포함한 양주군(당시 구리는 양주군에 포함) 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17명이었다.

n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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