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①2일간의 '해방' 안성 만세고개
남한 유일 3대 실력 항쟁지…당시 언론 '안성사건' 지칭 대서특필
4·1만세 항쟁, 127명 기소·최고 징역 12년…24명 순국
[편집자 註]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가 기간 뉴스 통신사인 연합뉴스는 '[3·1운동 유적지를 가다]'라는 내용으로 오는 21~24일까지 13개 기사를 송고할 예정입니다. 3·1 독립운동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했는데, 연합뉴스의 장기인 지방 취재망을 가동해 전국 각지의 3·1운동 유적지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안성=연합뉴스) 최해민 기자 = "피고들의 선동에 응하여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 등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로서…."(1919년 경성지방법원 민족대표 33인 등 판결문)
3·1운동의 주축이 된 민족대표 33인이 속한 손병희 외 47명의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나온 내용이다.
1919년 민족대표와 일행을 심리하던 일제 치하 법원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진 실력 항쟁지 3곳을 언급하면서 3·1운동이 '폭동'의 원인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실력 항쟁이란 공공기관 기물파손과 방화 등 실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다른 만세운동과 구별된다.
전국 3대 실력 항쟁지 중 남한에선 유일하게 안성 양성·원곡면이 꼽혔다.
안성에서 있었던 4·1만세항쟁이 서슬 퍼렇던 일제 치하에서 이틀간 '해방구'를 가져다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안성에서도 독립을 열망하는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3월 28일 원곡면에서는 고종의 국장을 참관하러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최은식 선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최은식 선생은 불과 21세였다.
지인들과 뜻을 모은 최은식 선생은 지문리, 내가천리, 외가천리, 월곡리, 죽백리 주민들과 원곡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은 다음날과 사흗날,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모여 일본인들이 근무하는 면사무소 등 관청 앞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자진해 해산하는 식이었다.
거사가 있었던 4월 1일.
무려 1천여명이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웅장한 "독립 만세" 외침이 울려 퍼지자, 주민들은 면장과 면서기 등 공무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 하면서 인접 마을인 양성면까지 걷게 했다.
만세 행렬은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에 있는 성은고개(현 만세고개)로 이어졌다.
성은고개에 도착한 후 주도자 중 한명인 이유석 선생은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요. 양성주재소(지금의 경찰 파출소 규모)로 가서 순사들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를 불태웁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최은식 선생은 "조선이 독립하면 주재소, 우편소는 필요 없으니 부숩시다. 일본 관헌이 만든 서류는 독립되면 쓸데없으니 불태우고, 일본인을 동네에서 추방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당시 양성면에서도 1천여명이 운집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은 원곡면에서 성은고개를 넘어온 1천여명과 합세해 양성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불태웠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과 고리대금업 가게도 만세운동 행렬을 피해 가지 못했다.
2천여명의 주민은 다음날 새벽 원곡면사무소도 부수고, 서류를 모두 태웠다.
양성·원곡면에 있던 일제 통치기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양성·원곡면에 있던 일본 경찰, 공무원, 민간인들은 모두 만세 행렬을 피해 평택 등 인근 지역으로 도피했다.
이로써 양성·원곡면은 1919년 4월 1∼2일 이틀간 일본인을 몰아내고 짧은 해방을 맛봤다.
이후 만세 행렬은 평택까지 점령해 경부선 철도를 파괴하는 데 뜻을 모았으나 일본군이 출동하면서 무산됐다.
일본인을 몰아낸 성과로 양성·원곡면은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혔다.
그런데도 만세 행렬은 '비폭력'을 표방한 3·1운동의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통치기관에 실력 행사를 하면서도 일본인들을 한명도 해치지 않았다.
이를 놓고 학예연구가들은 안성 4·1만세항쟁이 인명피해를 내지 않으면서 '통치에 저항'한 실력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후폭풍은 거셌다.
안성 시골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쫓겨나고, 통치기관이 모두 불에 탔다는 보고를 들은 일본 경찰은 무자비한 보복에 나섰다.
체포 과정에서, 그리고 체포된 뒤 고문과 폭행으로 인해 20명이 순국했다.
부상으로 고통받다가 순국한 열사도 4명이나 됐다.
또 4·1만세항쟁으로 최은식 선생을 포함한 127명(2명은 재판과정서 순국)이 기소됐다.
처음 일본 검경은 '내란죄'를 적용해 첫 재판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등법원에서 진행했다.
하지만 고법은 내란죄가 아닌 보안법 위반·소요죄라고 판단해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내려보냈고 재판이 지연되면서 열사들은 미결 상태로 무려 500일간 구금됐다.
최 선생을 비롯한 주도자들이 징역 12년형을 받는 등 중형을 받기도 했다.
언론은 4·1만세항쟁을 '안성사건'이라고 이름 붙여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안성의 4·1만세항쟁 정신을 기리는 움직임은 1984년 민간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주민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원곡면 칠곡리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이후 관에서도 안성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성은고개의 공식 명칭을 '만세고개'로 변경했고, 만세운동을 벌인 만세고개 꼭대기에 1993년 기념비를 건립했다.
현재 이곳에는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안성문화원은 매년 4월 2일 4·1만세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고,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는 제례행사를 열고 있다.
안성 3·1운동 기념관 관계자는 "안성 4·1만세항쟁은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짧은 해방을 이룩할 정도로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었다"며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후대에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기념관 특별전시와 각종 문화행사 개최 등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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