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조선인들, 일본군에 엄청나게 맞았고 항상 배고팠다"

입력 2019-02-17 10:46
수정 2019-02-17 10:57
"그때 그 조선인들, 일본군에 엄청나게 맞았고 항상 배고팠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증언하는 한반도 출신 강제동원 피해자 '잔혹사'

"배고픔에 고구마 훔치다 참수…조선인 도운 오키나와 주민도 맞아"



(모토부초[일본 오키나와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어머니나 어른들이 늘 얘기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일본 병사들에게 항상, 그것도 엄청나게 맞았다고. 이제 좀 그만 때려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에요."

일본 오키나와(沖繩) 북부 모토부초(本部町)에서 만난 가베 마사노부(77) 씨가 들려주는 강제동원 조선인 얘기다.

그는 일본 시민들이 발견해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 등이 함께 발굴할 계획인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매장 추정지의 소유주다. 이 곳은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항상 배가 고프니 우리 집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감자와 고추를 받으면 기뻐하면서 맛있게 먹었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심하게 맞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이 무서워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가베 씨는 "전쟁 때 오키나와 사람들도 많이 희생당했다. 희생당한 조선인들도 상처를 치유 받았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그는 재산상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유골 발굴에 흔쾌히 동의했다.

가베 씨의 주차장에는 군수물자 보급선 '히코산마루(彦山丸)'에 타고 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숨진 김만두(경남 남해·사망당시 23세) 씨와 명장모(전남 고흥·사망당시 26세) 씨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들의 매장 추정지에서 밤에 원혼이 나타나 물을 달라고 한다는 으스스한 소문도 있다. 이에 희생자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집 밖에 물을 떠 놓는 주민들도 있다고 한다.



매장 추정지를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현지 단체 '오키나와 한(恨)의 비'의 오키모토 후키코 활동가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는 "먹을 것을 구걸하다가 걸려서 일본군에게 맞는 조선인들을 봤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나왔다.

주민 중 한명은 "일본군에게 욕설을 들으며 군화로 걷어차이며 울고 있는 사람을 봤다. 물에 빠진 조선인을 구해줬다고 오키나와 사람을 일본군이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에서 조선인들이 겪은 고초는 위령비인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에 지난 2017년 이름이 올라간 박희태(사망 당시 25세) 씨의 사연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경북 봉화에서 군속(군무원)으로 끌려온 박 씨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민가에서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가 들통났고,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고향에서 같이 온 3명의 조선인과 함께 박 씨의 목을 베었다.



오키모토 씨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을 수족처럼 부리다가 참호로 도망치면 위협 사격을 가해 쫓아냈다는 증언도 있다. 폭탄이 참호로 떨어지면 조선인 탓이라며 괴롭히기도 했다.

형제들이 같은 날 끌려가 이 중 동생이 오키나와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연도 있다.

바로 모토부초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김만두 씨 형제의 이야기다.

김만두 씨는 형 김만실 씨와 같은 날 일본군에 잡혀가 '징용살이'를 했다. 동생은 오키나와에, 형은 히로시마(廣島)와 오카야마(岡山)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동생 김만두 씨는 오키나와에서 숨져 땅속에 묻혔고, 형 김만실 씨는 다행히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김만실 씨는 몸 곳곳에 일본군에게 당한 상처를 안은 채 평생 일본군의 만행에 치를 떨며 살다 지난 1992년 세상을 떠났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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