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입자] "전세만기 지났는데" 보증금 못 받은 임차인 '발 동동'
역전세난 위험에 임차인 경매신청 증가 추세…수도권도 '주의보'
"만기 임박한 세입자 보호방안 미비…반환보증 규정 개선 필요"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 1. 경기도의 투룸 다가구주택에 사는 A씨는 요새 매일같이 법무사와 통화를 하고 있다.
전셋집 만기가 한달가량 지났지만 언제 보증금을 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A씨는 2017년 1월 전세 보증금 8천500만원을 내고 이 다가구 주택에 들어왔다. 계약 기간은 2년이었다.
A씨는 집주인에게 계약 만료 두 달 앞둔 지난해 11월 계약 갱신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집주인 역시 이에 동의했다.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해 계약하고 이사 날짜만 협의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A씨는 만기를 불과 열흘여 앞두고 집주인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았다.
새로운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 만기일까지 보증금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집주인은 다주택자여서 대출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돈을 구할 데가 없다며 일단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A씨는 만기일에 맞춰 이사할 집 잔금을 치르기로 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부랴부랴 법무사를 만나 상담을 하고 내용 증명도 보냈지만, 그때부터 집주인은 연락 두절이 됐다.
A씨는 법무사와 상의 끝에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경매신청을 진행하기로 했다.
# 2. 2017년 3월 결혼한 30대 직장인 B씨는 서울 송파구의 전용 약 59㎡ 규모의 다세대 주택에 2억원 보증금을 내고 전세를 구했다.
같은 해 여름 임신을 하면서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길 마음을 먹은 B씨는 일찌감치 집주인에게 전세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전달했다.
하지만 만기가 다가오도록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자 불안해진 B씨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다음 달까지 세가 안 나갈 것 같아 전세금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근 송파구 일대에 전세 물량이 쏟아진 바람에 가격을 낮춰도 문의조차 없다는 것이다.
늦어도 아이가 태어나는 오는 4월까지는 나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집주인은 이미 대출금이 많아서 새로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고 난색을 보였다.
오히려 집에 결로가 생겨서 세입자가 안 구해지는 것 같다며 B씨를 탓했다.
마음이 급해진 B씨는 자신이 돈을 들여 새로 도배를 해놓을 테니 예정된 날짜까지는 꼭 보증금을 빼달라고 오히려 집주인에게 부탁했으나 그마저도 확답을 받지 못했다.
17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대출 규제가 강화된 가운데 공급 물량이 늘면서 전셋값이 떨어지자 제때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면 기존 세입자에게 내줄 돈을 융통하기 어려운 집주인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는 상황이다.
새로운 세입자가 구해진다고 해도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떨어진 곳은 집주인이 받을 돈보다 줘야 할 돈이 더 많기 때문에 보증금의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추후 돈이 생기는 대로 주겠다고 우기는 일마저 왕왕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전세 보증금 반환 문제로 고통받는 세입자의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청원인은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임대인을 법적 처벌해달라'는 제목의 게시글에서 "아파트 매매가격이 전셋값보다 떨어지다 보니 집주인이 '보증금을 못 돌려주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 청원인은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임차권 등기 신청, 채권 압류 등 600만원을 들여 소송 중이지만 집주인이 다른 재산은 모두 남편 등 다른 가족의 명의로 돌려놓은 상태라 별 방법이 없다고 한다"며 "임대인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집주인은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깡통전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다른 청원인은 "전세 빠지기를 4개월 동안 기다렸는데도 아직 안 나가고 있다"며 "새 학년 새 학기가 다가오는데 아이들에게 전학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할 뿐 아무 결정을 할 수가 없어 고통스럽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SGI서울보증이 집주인 대신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준 액수는 1천607억원으로 전년(398억원)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 건수는 6만1천905건에서 11만4천465건으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을 들어두지 않은 세입자는 더욱 막막하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은 계약 기간이 2분의 1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
결국 '최후의 수단'인 강제경매를 신청하는 일도 늘고 있다.
지역 경기 침체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은 지방뿐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임차인의 경매신청 건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법원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수도권 아파트 임차인 혹은 전세권자가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경매(강제경매·임의경매 포함)를 신청한 경우는 2017년 108건에서 지난해 125건으로 15.7% 늘었다.
지난달에는 전월보다는 5건 많은 17건의 신청이 들어왔다. 이 가운데 낙찰가가 채권청구액보다 낮은 건수는 37건이었다.
2017∼2018년 도별 신청 건수는 강원은 7건에서 12건, 전북은 26건에서 33건, 경북은 15건에서 36건, 경남은 25건에서 45건, 충북은 12건에서 17건, 충남은 26건에서 49건으로 각각 늘었다.
전남만 20건에서 19건으로 1건 줄었고 제주는 2건으로 동일했다.
지지옥션 서지우 연구원은 "부동산 시장 상황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임차인의 경매신청이 증가하는 추세이고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며 "집주인으로서는 가장 꺼리는 상황이겠지만 보증금을 떼일 위기에 처한 임차인이라면 마지막 수단으로 경매신청을 고려해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전체 주거시설 경매에서 임차인 신청에 의한 경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전셋값이 매매가격과 엇비슷하거나 아예 추월해버린 지방과 달리 수도권의 경우 역전세가 아직 위험 단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전셋값이 하락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2년 전 가격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불안한 만큼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보험료를 낮추거나 만기까지 잔여기간과 상관없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세입자 보호 방안을 강화할 필요는 있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안명숙 부장은 "아직 서울은 역전세 문제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나 물량이 늘어나는 만큼 송파·강동을 중심으로 내년까진 전셋값 약세가 이어질 것 같다"며 "전세 만기가 1년 이상 남아 있다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하는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박원갑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과거와 달리 매매와 전셋값이 동시에 하락하고 있어 지방을 중심으로 이른바 '깡통주택', '깡통전세' 문제가 함께 나타날 수 있다"며 "수도권은 아직 주의보 수준이지만 물량이 많은 만큼 모니터링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세입자는 소송이나 경매 외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 의무화, 보험료 인하, 가입 시기 확대 등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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