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에메랄드빛 슬픔…발굴 기다리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입력 2019-02-14 12:00
오키나와 에메랄드빛 슬픔…발굴 기다리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사망·실종자 최대 1만명 추정…곳곳에 조선인 집단매장 추정지

日, DNA 대조에 조선인 제외…유족 고령화로 '귀향' 가능성 작아져

(기노완시[일본 오키나와]=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에메랄드빛 바다, 그 속에 넓게 펼쳐진 산호초, 파란 하늘과 환상적인 리조트….

일본의 '하와이'로 불리며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지 오키나와(沖繩)는 일제 강제동원의 가슴 아픈 역사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일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정확한 실태 조사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말기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와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은 최대 1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4일 오키나와 현지 시민단체인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에 따르면 일본 패전 후 조선인 유골로 특정돼 고국으로 봉환된 예는 '구중회'라는 인물 1명뿐이다.



구 씨는 전쟁 전부터 오키나와에 살던 사람이다. 따라서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돼 사망·실종된 사람 중에는 살아생전 꿈에 그리던 조국에 죽어서라도 돌아간 사람은 단 1명도 없는 셈이다.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보급기지를 확보하려는 미군과 제국주의 일본군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징병이 아닌 징용으로 끌려와 비행장을 건설하거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했는데,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들을 전투에 동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키나와 한의 비의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활동가는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많은 젊은이를 강제동원했다"며 "이들은 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버려졌다"고 설명했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처참하게 죽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연은 오키모토 씨 같은 오키나와 시민들에 의해 기록되고 있다.

군속으로 오키나와에 끌려온 박희태 씨의 경우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민가의 고구마를 훔쳐 먹다 그 자리에서 고향에서 같이 온 3명의 조선인과 함께 참수를 당했다.

유족과 주변인의 진술로 이런 사실이 확인돼 박희태 씨의 이름은 지난 2017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 내 위령비인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에 뒤늦게나마 새겨졌지만, 그 역시 어디에 묻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키나와 곳곳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집단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산재해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자들의 유골이 대부분 일본인이나 현지 오키나와 주민 등의 유골과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 신원 확인이 쉽지 않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해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 작업을 해 유골을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지만, 전쟁 중 끌고 왔던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과 이 문제를 협의할 방침을 밝혔지만,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유골이 고향의 유족들에게 돌아갈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본의 배제와 한국의 무관심 속에 유골이라도 가까이 모시려던 유족 중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주인을 찾지 못한 유골들을 소각 처리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유골이 소각되면 유족과의 DNA 대조가 영영 불가능해진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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