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28) '독립선언서와 횃불'이 SNS 역할
충남·북 간 거사 의지 전파 수단…도계 넘나든 봉기 실행
(세종=연합뉴스) 이재림 기자 =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임금이 세상을 떠남)는 한반도에 혼란을 더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궐 밖에선 일제의 만행이라는 입소문까지 퍼지면서 흉흉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1919년 3월 3일 인산(왕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2월 중순께 충청도에서 서울로 온 기독교인 김재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동완 선생(당시 정동제일교회 전도사)에게서 독립선언문을 받게 된다.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그는 고향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충청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선언서 전달과 횃불 봉기로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변변한 미디어가 없던 당시 독립선언서와 횃불은 만세운동의 열기를 주민들 에게 빠르게 확산시키는 오늘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다름없었다.
매일신보 판매업을 하던 김재형 선생은 연기군 조치원에 살던 김재석에게 독립선언문 500여장 중 350여매를 건네며 "문의·미원·보은 등지 주민에게 몰래 나눠 주라"고 주문했다. 나머지는 조동식 선생 등을 통해 이곳저곳에 배부했다.
이런 내용은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와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등에 기록돼 있다.
이후 독립을 열망하던 조치원 지역 청년들은 1910년 국권침탈 후 연기군으로 낙향한 홍일섭 선생을 중심으로 거사를 모의했다.
세종시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윤철원(62)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은 15일 "독립선언서와 횃불을 통한 전파력이 상당했다는 흔적은 당시 충청 지역 봉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면서 "1919년 3월 하순부터 이어진 마을 간 조직적인 시위에서 특히 잘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초대 조치원읍장을 지낸 맹의섭 선생의 '추운실기'(鄒雲實記)와 매일신보 등을 보면 1919년 3월 23일 조치원 횃불 만세운동에는 강내·강외·옥산·남이면 주민이 함께했다.
이날 오후 11시 조치원 주민들은 횃불을 들고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강내면 대성산 부락민 등도 횃불을 올리고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사기를 올렸다.
같은 날 상황을 전한 매일신보는 "23일 밤 11시가량부터 조치원에서 동남쪽으로 약 15리(6㎞) 되는 청주 강내면에서…산상에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며 점점 조치원을 향해 달려왔다"고 돼 있다.
기사는 "그 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2천∼3천 명가량 되는 모양이며…(조치원에선) 만일을 경계하는 중이다"라는 식으로 이어진다.
한날한시에 횃불을 들어 올린 이 날의 모습은 당시의 연락망을 고려하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윤 위원은 평가했다.
2010∼2012년 조치원읍장을 지낸 윤철원 위원은 "이날 펼쳐진 횃불 시위는 도 경계에 있던 마을 주민이 연합한 전국 첫 사례라고 볼 수 있다"며 "그런데도 조선총독부 측 자료엔 일부 봉기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일제가 일부러 빼놓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독립선언서와 횃불로 퍼져나간 이 지역 시위 열기는 이후 같은 달 24·26·27일 충남 연기군 동면에서 이어받았다.
30일에는 조치원 장터에서 대규모로 진행됐다.
오후 2시 30분 시장 한 모퉁이에서 들려온 만세 소리는 수천 명의 외침으로 커졌다.
미리 헌병대를 파견했던 일제는 홍일섭 선생을 비롯한 수백명을 붙잡아 매질하거나 가뒀다.
김규필 선생과 전병수 선생은 너무 많이 얻어맞아 크게 다쳤다는 사료도 있다.
주동자로 몰린 홍 선생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와 횃불의 물결 속에 오창·강의·부용면, 공주군 장기면, 보은군 등지로 번져갔다.
윤철원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은 "당시 관점에서 독립선언서와 횃불이 일종의 소셜미디어 같은 힘을 보인 셈"이라며 "금남면 2천300명을 비롯해 연서면과 남면 등 현재의 세종시 지역에 살던 선조들이 천안이나 서울 못지않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이어갔다"고 덧붙였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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