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개발 상징' 영변 버리고 평화·실리 취하나
영변은 원자로·농축 시설 등 390개 이상 건물 갖춘 北 핵개발 산실
종전선언 등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美전향적 입장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 핵 개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영변 핵시설의 폐기를 통해 교착국면의 북미 비핵화 협상에 돌파구를 열어갈지 주목된다.
북한 핵 폐기의 진정성을 두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회의감이 갈수록 커지는 가운데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입장을 재확인함으로써 제자리걸음만 하던 비핵화 협상에 강력한 추동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은 작년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면담 때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시설의 폐기 및 파기를 약속했다고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 대학 월터 쇼렌스틴 아·태연구소 주최 북한 관련 토론회에서 밝혔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모두 갖춘 북한 영변 핵시설의 폐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영변 핵시설은 단순히 플루토늄뿐 아니라 우라늄 농축시설도 갖춘, 북한 핵 개발의 역사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은 1979년 자체 기술로 5㎿급 실험용 원자로 건설을 자체 기술로 착공해 1986년 말 본격 가동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으며 1994년 핵연료 인출로 국제사회에 핵 개발 우려를 키웠다.
영변 핵시설은 원자로뿐 아니라 방사화학실험실과 동위원소 생산가공연구소 등 핵 개발 관련 실험 및 연구시설도 갖춘 핵 개발의 산실이다.
일각에서는 영변 핵시설과 관련해 북한이 고철 더미를 갖고 미국과 협상한다고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영변 핵 단지 안에만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해 390개 이상의 건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미국 스탠퍼드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 분리기 1천여기를 갖춘 영변 우라늄 농축시설을 직접 보고 오기도 했다.
안진수 전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책임연구원은 "지금은 우라늄 농축시설의 규모가 배로 확장된 것으로 위성 사진상 확인되고 있다"고 전했다.
사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과 발표한 평양 공동선언에서 '미국의 상응 조치'라는 전제조건을 달긴 했지만, 처음으로 최고지도자의 명의로 영변 핵시설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공동성명은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당시 방북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영변 핵시설을 영구히 폐기한다면 영변에서 이뤄지고 있는 핵물질이나 핵무기 생산을 비롯한 핵 활동이 중단에 들어간다는 뜻이 될 것 같다"며 "(김 위원장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까지 언급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이은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특히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면담에서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표명됐을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 부위원장 면담 이후 북미 최고지도자가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전망에 긍정적 입장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미뤄 영변 핵시설의 폐기가 실행될 경우 향후 비핵화 진전의 중대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 핵의 상징성을 가진 영변 핵시설의 폐기는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고 완전한 비핵화의 구체적이고 실질적 조치의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결국 북한 지도부가 영변 핵시설을 과감히 포기하고 북미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킴으로써 사실상 평화와 실리를 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동안 대북제재 완화 없이는 관계 개선은 없다는 입장을 주장하며 버티기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더는 미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비건 대표는 이날 강연에서 북한 비핵화가 완료되기 전에는 대북제재 완화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재확인했다.
따라서 북한 지도부는 미국이 당장 만족할만한 수준의 상응 조치를 내놓지 않더라도 일단 트럼프 대통령을 믿고 비핵화 조치 등에서 움직여 보겠다는 결심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그동안 고수해온 선(先) 핵 프로그램 신고 입장을 포기하고, 남측과 국제사회의 인도적 대북지원에 일부 예외를 적용하는 등 유연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비건 대표는 "우리 쪽에서는 양측에 신뢰를 가져다줄 많은 행동을 실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언급은 미국이 상응 조치의 하나로 체제 안정을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안간힘을 쓰는 북한 지도부의 입장을 일부 수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건 대표는 "미국의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70년간의 전쟁과 적대감을 뛰어넘어야 할 시간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며 "이러한 갈등이 더는 계속될 이유가 없다"라고도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을 언급한 데 이어 올해 첫 해외 방문으로 방중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만나서도 항구적인 평화보장 토대를 구축하는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 교수는 "김영철 부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에게 약속했던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해 보다 확실한 약속을 재확인했을 수 있다"며 "이에 상응해 미국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같은, 북한이 우려하는 체제 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이뤄내는데 합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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