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떼기'급 표절…서울대가 철저히 조사해야"

입력 2019-01-15 10:00
수정 2019-01-15 10:45
"'차떼기'급 표절…서울대가 철저히 조사해야"

'신학서적 표절반대' 운영자 이성하 가현침례교회 목사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김예나 기자 = "(표절작으로 의심되는 배철현 전 서울대 교수의)『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는 우리 신학계에서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될 만한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죠."

한국 인문학계의 '슈퍼스타'였던 배철현 전(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 표절 의혹을 제기한 이성하 원주 가현침례교회 목사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이 목사는 한국 신학계에 만연한 표절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모임인 페이스북 그룹 '신학서적 표절반대'를 운영중이다. 그는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맹호성 이사 등과 함께 지난해 12월 초에 배 전 교수의 표절 의혹을 처음 제기했다.

이 목사는 1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대중에 알려진 배철현 (전) 교수의 명성을 생각했을 때 표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설교 준비를 위해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쓴 책을 보던 중 주석의 인용 출처에서 '배철현' 이름 세 글자를 보고 확인해본 게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분명히 사르나(Nahum M. Sarna) 『유다출판협회 모세오경 주석서 창세기편』(The JPS Torah Commentary Genesis, 1989년 출간)에 나왔던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논문의 인용 출처 표시는 배철현『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2001년 출간)으로 돼 있어 지난해 12월 6일 배 (전) 교수에게 이메일로 문의했다. 배 (전) 교수가 '실수'라며 수정하겠다는 답변을 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실수'로 볼 수 없는 정황이 그 뒤로도 속속 발견되면서, '혹시나' 하는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이 목사는 설명했다.

사르나의 주석서뿐 아니라 그로스펠트(B. Grossfeld)와 아버바흐(M. Aberbach)의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Targum Onkelos to Genesis, 1982년 출간)의 각주 해설을 거의 고스란히 가져다 쓴 부분도 있었다.



이 목사는 "배 (전) 교수의 표절은 정교하고 교묘한 게 아니라 '차떼기' 급"이라고 평가하면서 "책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본인에게 문의하자, 도리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며 조롱 섞인 말까지 했다"고 말했다.

배 전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몇몇은…의 주제를 따랐다", "각주를 비교·참조하였다"는 표현을 썼으나, 이는 '∼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전형적인 사은형(謝恩形) 표절이라는 게 이 목사의 주장이다.

특히 종교학이나 신학의 경우, 연구 내용이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학자의 연구 내용을 교묘하게 가져다 쓴 것인지 등을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출처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설명한다.

다만 배 전 교수의 경우 '차떼기'식으로 문장과 세부 표현까지 그대로 가져 온 분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일단 출처를 찾아내기만 하면 비교는 매우 쉬웠다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

이 목사는 "구약 연구, 유대교 연구를 위해 필요한 학술 분야에서 『타르굼』과 같은 책이 표절됐다는 건 윤리적 수준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타르굼』 책은 배철현이라는 인물의 교수 임용부터 승진까지 다 걸려있는 문제"라며 "서울대는 사표를 수리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처음부터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철현 전 교수의 역주서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는 그의 유일한 학술연구 저술 단행본으로, 그가 2002년 세종대 교수를 거쳐 2003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될 때도 주요 연구 업적으로 제출됐다. 이 책은 '타르굼'(예수 시대에 쓰이던 언어인 아람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을 최초로 한국어로 옮기고, 상세한 역주 해설을 단 학술적 역작으로 그간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이 목사가 중심이 된 '신학서적 표절반대' 그룹은 결성 첫 해인 2015년 현직 신학대학 교수들의 개론서·강해서에서 표절 의심 차례를 무더기로 찾아내 문제를 제기했다.

일부 교수는 '마녀사냥식 비방이다', '표절이 아니라 책의 장르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표절 사실을 부인했으며 민사소송 제기와 형사고소로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출판사가 자진해서 책을 절판하는 등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시인하고 바로잡은 사례도 있었다.

이 목사는 "표절은 한 사람의 명예욕을 충족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당한 연구 경쟁으로 교수가 돼야 할 사람을 가로막고, 정직한 교수에게 배워야 할 학생들의 교육 기회도 박탈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표절한 저서, 학술 논문이 남아 있으면 후학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연구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며 "서울대와 배 전 교수의 대응을 보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지만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 목사는 표절 등 연구부정행위의 징계 시효 역시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적발되더라도 징계시효가 3년으로 돼 있는 탓에 대부분 '솜방망이' 처분에 그치거나 아예 '면죄부'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목사는 "지금처럼 제도가 미비하고, 표절을 저질러도 징계되지 않는다면 누가 (표절을) 안 하겠느냐"며 "들키지만 않으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으니 제2, 제3의 배철현 그리고 표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배철현 사건은 학계의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표절 등 부정행위가 발생한 날이 아니라 적발된 날로부터 3년을 들여다보고 징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조항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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