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①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평화 원한 서독인의 시선, 통일 이상론에서 현실적 공존으로
신동방정책 놓고 보수·진보 극심한 갈등…헌재 결정이 분기점
보수 유권자의 다수, 동독과 공존 찬성…신동방정책 통한 편익도 크게 작용
박명림 "남남대화·통합은 남북대화·화해 성공의 전제조건"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봅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갈 예정입니다.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을 주제로 한 첫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6일간 연재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① 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② 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③ 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④ 박명림 "北만큼 野대화 중시필요…비핵-북미수교 교환해야"
⑤ 前전독일연구소장 데틀레프 퀸…"南시민의 北방문 자유 인정 필요"
⑥ 30년전 서독청년…"장벽 무너질 때 금맥 발견한듯"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반세기 전 독일 분단기의 서독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은 우리나라의 상황이 연상된다.
당시 서독이 동독과의 평화체제 구축, 교류·협력 등 관계 정상화를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맥이 통한다.
1960년대 말 당시 서독인들은 동구권의 위협에 마주해 평화를 갈망했다. 폐허만 남긴 2차세계대전의 트라우마로 전쟁 재발에 대한 공포가 컸다. 동독 한복판에 섬 같은 서베를린에 대한 봉쇄 위협도 눈앞의 해결 과제였다.
전쟁,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고 평화를 바탕으로 국가를 재건하려는 소망은 동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독의 국가(國歌) '폐허에서 일어날지니(aus ruinen auferstanden)'에서도 이런 의지가 읽힌다.
북한의 핵무장에서 비롯된 한반도 긴장고조 국면에서 지난해 세대와 지역, 지지하는 정당을 불문하고 우리 국민이 남북한 화해와 협력에 지지를 보낸 배경과 유사하다.
동독 정권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서독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통일 이상론에서 공존을 위한 현실론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시작된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 공존을 위한 '작은 발걸음'은 20년 간 멈추지 않았다. 작은 변화들이 만든 균열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우리 사회에선 서독 내에서 이런 과정이 큰 탈 없이 전개됐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다. 독일 정치가 제도적 뒷받침과 시민정치교육 등을 통한 성숙한 시민문화의 토대 속에서 토론과 타협에 능하다는 인식 탓일 것이다.
그러나 서독 정부가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통일의 주춧돌을 쌓아 올린 '신(新)동방정책'을 추진할 당시, 서독 사회는 극심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북관계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남남갈등'처럼 서독에서도 보수와 진보세력 간에 '서서갈등'의 양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갈등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진행되고, 동서독 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이자 근간인 기본조약에 대한 헌법소원까지 제기됐다.
서독보다 정도는 약하지만 4·27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을 둘러싼 갈등과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서'의 대통령 비준을 놓고 벌어진 위헌논쟁이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서독의 통일 관련 국책연구기관인 전(全)독일문제연구소장을 지낸 데틀레프 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조약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정치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했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대북 '퍼주기' 논란과 북한의 인권 문제가 '남남갈등'의 단골 사례인 것처럼 반세기 전 서독도 비슷한 갈등을 이미 경험했다.
둘로 쪼개진 서독 사회를 묶은 것은 표면적으로 정치적, 법리적 해법이었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동독과의 관계에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원하는 도도한 민심이 흘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서독은 숱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인적ㆍ경제적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동서독의 정부 및 시민 모두 평화에 대한 추구와 함께 교류ㆍ협력을 통한 편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도 컸다.
교류·협력에 따른 편익은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진보정권이 몰락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동방정책이 꾸준히 실행되게 한 원동력이었다.
50년 전 동서독을 지금의 한반도와 평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외교지형과 경제적 상황이 다르다. 한반도에선 민족상잔의 비극을 치러 보수와 진보, 남북 간의 대립 구도가 더욱 구조적이다. 특히 북핵이라는 '블랙홀'도 있다.
하지만, 한국도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국제정치의 복잡한 '체스판'에서 슬기롭게 맥을 짚어야 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정상화 과정을 밟아가야 하는 점은 이미 50년 전 서독이 마주했던 운명과 결이 다르지 않다.
서독이 어떻게 대내적으로 극심한 갈등을 슬기롭게 관리하고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이룰 수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 안에선 탈권위·밖에선 달라진 소련…신동방정책 앞으로
1950∼1960년대 장기집권해온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정권이 동독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동구권과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갈 수 없다는 인식이 쌓이면서 새로운 대동독정책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서독 사회에 형성됐다.
더구나 1948년 소련에 의해 봉쇄를 겪는 등 여러 차례 위기를 겪은 서베를린 문제는 서독의 여전한 아킬레스건이었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의 데탕트(긴장완화)가 시작됐지만 서독과 동구권의 관계 개선은 제한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평화를 추구하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됐다.
반전과 탈권위를 내세운 '68 학생운동'의 유산도 작용했다. 성공하지 못한 운동이었지만, 기존의 질서를 배격하는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안드레아스 베셀-테하른 연방경제에너지부 신연방특임관실 담당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60년대 유행하던 기성층의 사고방식이 있었다. 젊은이나 학생들이 사회 현상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 '너 그렇게 생각하면 동독으로 가'라고 했다"면서 "신동방정책이 성공하면 이런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대외적 환경의 변화도 결정적인 요소였다. 소련은 체코 '프라하의 봄' 무력진압으로 인한 국제사회 지탄과 중국과의 국경분쟁, 경제사정 악화 등의 대내외 변수 속에서 서독과의 관계 개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대내외적 흐름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1969년 총선에서 약진하면서 기업 친화적인 자유민주당과 손을 잡고 연정을 구성했다. 기업 자본 역시 평화와 공존을 선택한 셈이다.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 오른 직후인 1969년 10월 28일 첫 시정연설에서 동독 정권에 대한 인정과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밝히며 막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서독 정부는 소련을 상대로 세심하면서도 도박 같은 외교전을 벌인 결과, 양측은 1970년 8월 12일 상호 무력 포기 및 긴장완화를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동서 긴장완화의 기초를 닦은 이정표였다. 특히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됐다.
소련의 변심으로 불안해진 동독은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2년 12월 동서독 화해와 교류·협력의 근간이 된 기본조약이 체결됐다.
기본조약은 양측 체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상호 간 무력사용을 금지하기로 해 평화·공존 시대로 들어서는 문을 열었다.
특히 경제·과학·기술·문화·통신·스포츠·환경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해 민간 교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후 10여년간 기본조약을 근거로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협력을 위해 체결된 협정은 30여 건에 달했다.
향후 남북관계가 화해와 협력을 위한 진일보한 조치와 세부적 협약들이 이뤄진다면 지난해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이 이뤄진 상황은 1970년대 초 동서독과 상당 부분 오버랩된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에선 북핵이라는 핵심적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다시 관계가 경색될 가능성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당시 동서독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 보수와 진보의 벼랑 끝 대치…기본조약 합헌 판결이 분기점
서독의 보수진영은 모스크바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특히 오데르-나이세강 동부지역인 슐레지엔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는 조항에 대한 반발이 컸다. 슐레지엔은 독일의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폴란드로 넘어갔다.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서독지역으로 반강제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슐레지엔 실향민들도 정부를 공격했다.
1972년 12월 체결된 기본조약을 놓고선 보수와 진보진영 간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여당인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에서 1969∼1972년 사이에 탈당한 의원만 해도 10명에 달했다. 야당은 1971년 4월 27일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밀어붙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야당인 기독사회당은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 체결의 무효화를 위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민족 통일과 동독인의 인권 관련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헌법 격인 기본권의 가치를 위반했다는 논리였다.
이에 헌재는 1973년 7월 31일 기본조약이 헌법 격인 기본법 전문의 통일 명제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기본조약을 둘러싼 극심한 대치상황이 풀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헌재는 결정문에 야당의 주장도 존중하는 내용을 담아 갈등의 확산을 막는 '판결의 예술'을 보여줬다. 동독 국민에게 서독 국민과 같은 권리가 주어지고,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인에 대한 동독군의 사격이 사라지도록 서독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명확히 주문한 것이다.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판결 다음날 기사에서 "야당의 패배라고 보기 힘들다"라며 "서독 정부가 동독과의 협상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반경을 설정해놓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독 인권 문제 등에 대해 상호주의를 이전보다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었다.
◇ 정치성향 떠나 동독과의 교류·협력 지지한 서독인들
풀릴 것만 같지 않았던 보수와 진보 간의 대립이 완화된 데에는 서독인들의 여론이 작용했다.
1972년 12월 총선에서 브란트 총리와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이 다시 승리한 직후,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가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찾아본 결과 이런 경향성이 두드러졌다.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 가운데 '기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투표했다'는 직접적인 응답이 44%에 달했다. 이들 유권자 가운데 70%는 '동방지역과의 화해와 긴장완화 과정이 진행되기를 원했다'고 답했다.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에 투표한 유권자 가운데서도 '브란트 정부의 신동방정책의 지나친 양보 경향에 반대했다'는 답변은 33%에 불과했다.
신동방정책의 추진 초반에 의구심을 품고 동구권에 대해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던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들마저도 대다수 동독과의 평화·공존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진보정권 몰락 후 보수정권에서도 신동방정책이 일관되게 이어지고 서서갈등이 관리된 데에는 이런 민심이 뒷받침돼 있다.
정당 간 연합이 가능한 헌정 체제 역시 신동방정책이 지속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소수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진보와 보수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18년 간 외무장관을 맡아 일관성 있게 신동방정책을 추진했다.
서독이 얻는 이익도 크게 작용했다.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는 "평화 정착과 서베를린의 고립 탈출, 이산가족의 자유왕래, 동독 여행, 분단기 중의 상호 이질감 완화, 동독인의 인권신장 및 수감된 정치범에 대한 인권침해 억지효과, 긴장완화로 인한 기업활동 증진 등이 서독의 편익"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동독은 서독 측에서 흘러오는 자금이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반긴 반면 서독은 내심 오히려 이를 통해 동독에 대한 정치·경제적인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요인을 통해 서독을 갈라치기했던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은 점점 완화됐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및 김대중도서관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서갈등이 해소되는 구체적인 정치적 과정은 연립의 지속 및 정책의 계승이 결정적으로, 연립·연합이 가능했던 헌정제도 덕이 컸다"면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독일이 유럽평화 파괴의 요소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자성과 성찰, 냉정한 현실주의와 이성이었고 동독의 호응과 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해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한반도 상황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을 통한 본격적인 남북 교류·협력, 비핵화와 북미수교 교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남남대화와 남남통합은 남북대화와 남북화해의 성공의 지름길이자 전제조건으로, 대한민국의 생사와 한반도 평화유지에서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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