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12)北 임정에 '부르주아 민족운동' 딱지
"분파 대립, 독립자금 탕진, 강대국에 구걸한 반인민적 정부" 혹평
김구·김규식은 긍정 평가…"인식차 줄이려면 연구 성과 축적해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 무장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을 강조하는 북한은 3·1운동에 대해서는 공과를 비교적 균형 있게 다루면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줄곧 혹평해 왔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가 2011년 발간한 '조선통사' 개정판은 3·1운동에 관해 서술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임시정부를 짧게 언급했다.
조선통사는 "3·1 인민봉기 과정에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 임시정부, 연해주 임시정부 등은 제각기 민족을 대표하는 정통적인 정부라고 자처하면서 서로 대립해 암투를 벌였다"며 "이 세 임시정부는 1919년 9월에 통합해 대한임시정부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치·사상적으로 통합되지 않아 이 망명단체 안에서는 분파적 대립이 계속됐다"며 "그들은 해외 교포들과 국내 인민들로부터 거둬들인 독립자금을 탕진하면서 강대국들에 독립을 청원하러 다녔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이처럼 임시정부가 갈등을 지속해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 민족운동이 전면적으로 쇠퇴하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 본격화했다고 주장한다.
학계에 따르면 북한은 1949년 발간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임시정부를 "매국노 민족반역자 이승만 분자들로 구성된 반인민적 정부"로 규정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지위와 권리를 탐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에 출간된 역사서적은 임시정부를 아예 거론하지 않았고, 외세의 영향력보다 민족 자주성을 중시하는 주체사관이 확립된 뒤에는 '조선통사'처럼 부르주아 민족운동 상층 분자들이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매국 행위를 했다고 공격했다.
북한이 1980년에 펴낸 '조선전사'는 임시정부 안에 파벌이 형성된 배경은 정치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려 한 정치적 야심에 있고,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인두세와 구국의연금을 걷고 공채를 발행한 것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고 비난했다.
임시정부를 가혹할 만큼 박하게 평가하는 북한의 태도는 각종 역사용어를 정리한 '역사사전'에서도 확인된다.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2001년 출판한 '역사사전'에는 임시정부 항목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사전'은 충칭(重慶) 임시정부 시절 주석과 부주석을 지낸 김구와 김규식은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역사사전'은 김구를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인사로 분류하면서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을 했다"며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진 이듬해인 1940년 주석이 됐다"고 임시정부 활동 이력을 짧게 설명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 끌려가 애국열사릉에 묻힌 김규식에 대해서는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장, 충칭 임시정부 부주석, 임시정부 내 좌익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 명예주석을 지냈다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1948년 함께 평양을 방문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왔고, 1990년 북한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논문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남북의 역사 인식'에서 "북한은 임시정부를 매국배족 행위를 한 망명단체에 불과하다고 본다"며 "파벌 싸움, 사대주의적 관점, 인민 수탈을 위한 책동을 임시정부 활동의 전부로 평가한다"고 분석했다.
3·1운동과 비교하면 임시정부를 향한 남북의 인식 차이는 매우 크다. 현재로서 남북 간 접점은 1940년대 무력투쟁을 모색한 임시정부가 조선독립연맹을 이끈 김두봉, 연해주 김일성 부대와 교류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김구가 1935년 주도해 설립한 한국국민당이 낸 잡지 '신한'에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가 활동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며 "김구와 김두봉은 1940년대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고, 임시정부와 김일성 부대는 각각 연락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남북 간 인식의 괴리를 극복하려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풍부한 성과를 축적해야 한다"며 "북한 역사학의 발전과정과 그들의 문제의식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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