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수도승부터 체코 농부까지

입력 2019-01-08 17:37
명배우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수도승부터 체코 농부까지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첫 무대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그는 마치 물과 같았다. 물이 둥근 컵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난 잔에 담기면 네모가 되듯, 그가 시마노프스키를 연주하면 시마노프스키가 되고 바흐를 연주하면 바흐가 되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보아도 그가 본래 지닌 바이올린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언제나 음악작품과 조화한 상태로 드러날 뿐 결코 그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테츨라프와 함께한 서울시향 음악회가 펼쳐진 지난 5~7일까지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음악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돼 서울시향과 올해 첫 공연을 함께 한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는 몇 년 전 내한공연 당시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의 연주를 선보이며 국내 음악애호가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마치 배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명배우처럼 음악작품에 따라 연주법과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서울시향과 함께 지난 5~6일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테츨라프는 마치 사랑의 황홀경에 젖은 사람처럼 보였다. 풍부하고 감각적인 비브라토와 관능적인 선율미를 한껏 살려낸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이 협주곡에 영향을 준 미친스키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진홍빛 꽃으로 물든 호숫가에 서 있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황홀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네."



반면 지난 7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선보인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에서 테츨라프는 비브라토를 절제한 소박한 음색으로 음과 음 사이 분절을 세심하게 조절해내며 마치 수도자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일찍이 테츨라프는 수년 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 3곡이 예수 탄생과 수난, 부활을 의미한다는 음악학자들 이론을 지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그의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의 연주를 듣더라도 테츨라프의 바흐 연주는 성당 제단 위 예수그리스도 그림과 어우러지며 한 편의 기도처럼 다가왔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서는 '괴물 같은 푸가'로 여겨지는 바흐 소나타 3번 2악장의 그 길고 복잡한 푸가의 그물망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테츨라프 연주는 경이를 넘어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다.

7일 공연 후반부에서 테츨라프는 또다시 변신했다. 서울시향 수석 단원들과 함께 연주한 드보르자크 현악5중주 제3번에서 그는 마치 체코 어느 시골에 사는 순박한 농부가 된 듯 강한 억양과 악센트를 살린 활기찬 연주로 드보르자크 음악 특유의 신바람 나는 리듬을 한껏 살려내며 청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서울시향이 이번 신년 무대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테츨라프 연주와 훌륭한 조화를 이룬 데에는 무엇보다 지휘봉을 잡은 마르쿠스 슈텐츠의 역할이 컸다. 슈텐츠는 지난 5~6일 공연에서 드라마틱하고 통찰력 있는 지휘로 서울시향과 테츨라프와의 협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공연 후반부에 연주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에서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알프스 교향곡'은 연주 경험이 많은 노련한 오케스트라라도 선뜻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은 대작으로, 무대 뒤에서 연주하는 금관 밴드까지 동원하는 등 음향 색채 표현이 특히 중요한 관현악곡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 뒤에 배치된 13명 금관 밴드 단원을 비롯해 총 116명 연주자가 참여했으니 지휘자로서 합주를 이끌어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슈텐츠는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알프스 산을 등반하는 과정을 다채로운 오케스트라 음향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오케스트라 여러 악기의 선율이 겹쳐지며 깊은 밤을 표현한 신비로운 도입부에 이어 심벌즈의 힘찬 타격이 콘서트홀을 눈 부신 태양 빛을 가득 채웠고, 다소 빠른 템포로 표현한 '등산' 주제에서는 서둘러 알프스산맥에 오르려는 등산가의 설레는 마음이 전해졌다. '알프스 목장' 장면에선 여러 타악기 주자가 섬세하게 소방울(cow bell)을 연주하며 알프스 목장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전하는가 하면, 윈드머신(wind machine)과 선더시트(thunder sheet)까지 동원한 '폭풍' 장면에서 오케스트라의 압도적인 음향은 청중의 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2019년 새해에 선보인 서울시향 첫 무대는 세계 최고 음악가와 함께한 영감 넘치는 무대였을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전해준 좋은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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