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차기 총재는 '트럼프의 사람'…신흥국들 불안한 시선
트럼프, 다자주의·국제기구에 회의적 시각 표출
"미·유럽 동맹 흔들린 게 문제"…신흥국 등 회원국과 갈등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김용(59·미국명 Jim Yong Kim) 세계은행 총재가 7일(현지시간) 돌연 사임을 발표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차기 총재를 선출할 기회를 얻게 됐다.
세계은행이 1945년 2차대전 후 각국 재건 자금 지원을 위해 설립된 이후 최대 지분을 가진 미국의 주도로 운영돼 온 만큼 그 총재는 미국 대통령이 선임하는 것이 불문율로 이어져 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럽 강국들이 뽑아온 것도 서방 강국들의 상호 양해로 유지되고 있는 비슷한 불문율이다.
이 때문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 총재를 포함해 역대 세계은행 총재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김 총재가 내달 1일자로 사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을 차기 총재 자리에 앉힐 수 있게 됐다.
IMF, 세계무역기구(WTO)와 함께 세계 3대 국제경제기구로 꼽히는 세계은행을 '트럼프의 사람'이 이끌게 되면서 다른 국가, 특히 신흥국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 임기 3년여 남겨두고 '전격 사퇴' / 연합뉴스 (Yonhapnews)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다자주의와 국제기구의 역할과 존재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189개 회원국을 둔 세계은행은 세계 빈곤 퇴치와 저개발·개발도상국 경제발전 재정 지원을 맡는 기구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이 개발도상국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해 왔다.
트럼프 정부는 WTO가 중국의 통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조직이라며 탈퇴를 위협하는 동시에 WTO 분쟁 해결기구인 상소기구 위원들의 신규 임명을 막는 방식으로 숨통을 조이고 있다.
김 총재가 임기 만료를 3년이나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임한 것과 관련해서도 트럼프 정부와의 갈등이 한 요인일 수 있다는 관측이 뒤따랐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해 세계은행의 130억달러(약 14조5천억원) 자본 증액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섰고 당시 이는 김 총재의 '승리'로 평가됐다.
당초 미국의 증자 반대 이유는 세계은행이 이미 금융시장 접근권을 확보한 중국에 여전히 대출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찬성으로 전환한 배경에도 세계은행이 대중국 대출을 줄일 것이라는 양해가 있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비슷한 시기 세계은행은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와 손잡고 여성 기업인을 위한 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IMF에서 중국을 담당했던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NYT에 "김 총재는 트럼프 정부를 달래는 한편 트럼프 정부가 적대적으로 대하는 지역에서 세계은행 일을 하는 데 솜씨 좋게 균형을 맞췄다"며 "새로 올 총재는 다자주의를 대하는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적개심에 맞추면서 세계은행 정당성을 지키는 어려운 과제를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차기 총재로 누구를 지명하든지 세계은행 회원국들과 기구 내부에서 갈등과 불만이 터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일부 회원국들은 신흥시장을 대표하는 인물을 총재로 요구하고 있다.
사실상 총재를 미국이 지명하고는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189개 회원국을 대표하는 이사회가 인선 절차를 관리하며 최종적으로 인선 권한을 갖는다.
미국 싱크탱크 글로벌개발센터(CGD)의 스콧 모리스 선임연구원은 블룸버그에 "언제나 실제로는 동맹의 문제였고 그중 75년간 유지된 핵심 동맹은 미·유럽 동맹"이라며 "이것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강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트럼프 정부가 세계은행에 대놓고 적대적인 인물을 총재 후보로 지명한다면 다른 국가들의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면서 "나가서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데 이를 확실히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명을 처음 받았던 2012년 나이지리아 당시 재무장관과 경선을 벌였다. 미국 지명자가 총재 자리를 두고 신흥국 도전자와 경합을 벌인 것은 사상 처음이었고,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6년 김 총재의 연임을 재빨리 승인한 것도 이런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당시 세계은행 직원 1만5천명 중 9천명으로 구성된 직원단체는 세계은행이 "리더십 위기"에 부닥쳤다며 집권을 둘러싼 "밀실 거래"를 멈추라고 항의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또한 김 총재 재임기 세계은행은 국부펀드, 금융업체를 비롯한 민간 투자자들을 재원으로 삼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이는 선진국이 빈국과 개발도상국을 돕는 세계은행의 전통적인 모델을 고수하려는 이들의 반발에 부딪히는 등 갈등요인이 기구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cheror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