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9) 식민초기 최대 비밀결사 조선국민회
평양 중심 항일 독립 무장투쟁 추구…숭실학교 졸업생 장일환 의사 주도
김일성 부친 김형직도 참여…北 '반일민족해방운동 새 단계 연 역사적 사변' 평가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조선국민회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국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체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가 계몽 운동이었다면, 조선국민회는 무장투쟁을 통해 자력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추구했다.
1917년 3월 23일 결성돼 일제 강점기 초기 북한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1918년 지도부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됐지만, 회원들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이듬해 3·1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한국독립운동사 제2권(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조선국민회는 평양 숭실학교 출신이 주축이 돼 신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학교 교사와 서당교사, 교회의 신도들로 구성됐다. 당시 회원은 전국적으로 1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당시 권총과 장총 등 20여점을 샀고 총포를 소지하지 못한 회원들도 전원 장도와 단도, 창 등으로 무장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그 운영을 철저히 기밀에 부쳤고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광역화하는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과 목적, 행동요령 등 정관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전달했다. 기관지 국민보를 발간해 국내외에 비밀리에 배포하기도 했다.
숭실학교 졸업생인 회장 장일환은 배민수, 백세민 등 숭실학교 출신 후배들과 함께 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 모여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죽음을 각오한 항일투쟁을 맹세했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서 일제 경찰에 발각돼 1918년 2월 9일 장 회장을 비롯해 핵심 회원 25명이 체포됐고 다른 회원들은 지방이나 만주로 피신했다.
이들은 훗날 대한국민회나 한국국민회 그리고 만주지방에서 조직된 한국국민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장일환은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체포된 지 두 달만인 1918년 4월 10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두개골과 대퇴부가 으스러진 채 평양구치소에서 순국했다.
운송업, 광산업 등의 사업을 하는 부호 집안 출신인 장일환은 20대부터 독립을 위해 교육과 선교, 비밀 항일투쟁을 병행했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12년과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하와이를 방문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맞서 무장투쟁론을 주창했던 박용만 등 독립운동가들과 회동한 뒤 귀국해 '조선독립청년단'을 발족했으며 이를 모체로 조선국민회로 발전시켰다.
'조선독립청년단'은 평양근교와 묘향산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했으며 평양주둔 일본군 헌병대장 관사 습격을 모의하기도 했다.
장일환은 1913년 안창호 선생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 청산학교를 설립했고 그해 말에는 미국인 길 목사와 함께 역시 평양에 연화동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광복 45년 후인 1990년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됐고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중 세 번째 등급인 독립장을 추서했다.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평양구치소에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제 경찰의 기록을 찾아볼 길이 없었고 유가족이 갖고 있던 자료들도 소실됐기 때문이다.
그의 장손인 세진(82)씨는 2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독립기념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내 묻힐 뻔했던 그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국민회 활동이 한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자료의 부족도 있었지만,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도 큰 몫을 차지했다.
조선국민회 회원 중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국민회가 김형직의 주도하에 결성됐으며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변"으로 평가한다. 조선국민회 창설 100주년인 2017년에는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보고 대회를 성대히 열었고 주민들에게 조선국민회 결성 장소인 '학당골' 참관을 장려했다.
북한이 김형직을 조선국민회의 핵심 조직자로 선전하면서 북한과 연계된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외면해왔던 한국에서는 조선국민회에 대한 연구가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장세진씨는 1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선국민회가 북한과 연관돼 있어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가 됐고, 남쪽에서도 연구자가 별로 없는데다 생각도 다 달라 부담이 됐다"며 "갈등이 생기는걸 원치 않아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역사 연구가들은 김형직이 핵심 인사인 것은 맞지만, 그가 조선국민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30년간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활동을 연구하며 왜곡 과장 사실을 밝혀온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 출신 유순호(57) 작가는 2017년 출간한 '김일성평전'(상권)에서 숭실학교 졸업생인 장일환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김형직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했다. 장일환이 중심에 있었다는 얘기다.
일제의 평안남도 경무부장이 조선국민회 회원 25명을 체포한 후 작성한 조사자료에도 김형직은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에 이어 네 번째로 명단에 등장한다
유 작가는 장일환이 평양구치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하기 수일 전 바람을 쐬는 시간을 틈타 함께 투옥된 김형직에게 조선국민회를 부탁하며 독립 투쟁을 이어가 달라는 유명(遺命)을 전했다고 김일성평전에서 밝혔다.
김형직은 장일환의 순국으로 사실상 와해된 조선국민회를 복구하기 위해 가족 부양에 대한 의무를 버리고 만주로 건너가 '직업 혁명가'로 나섰다고 유 작가는 덧붙였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에서도 "아버지(김형직)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민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고 기술했다. 조선국민회 핵심 4인을 언급한 것이다.
김 주석은 아버지가 동창생인 백세민, 리보식과 가깝게 지냈다며 이들을 '명망 높은 청년선각자들'이었다고 적었다.
조선국민회의 초대 멤버이자 막내로 당시 연락책 역할을 했던 배민수는 광복 후 숭실대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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