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5) 만세시위 확산 불 댕긴 북녘땅
3월 1∼14일 만세시위 71%가 한반도 북부서 발생…기독교 인사 주도
초반부터 폭력적 양상 드러내기도…"일제에 대한 지방의 전면적 저항"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목사 유여대는 1919년 3월 7일 평양지법 신의주지청에서 열린 검사 신문에서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을 이끌었음을 시인했다.
유여대는 검사가 "조선이 독립해도 혼란에 빠지고 실력이 없어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국민 전부가 독립정신이 충만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뤄진다.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답했다.
평북 의주는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원산과 함께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서울을 제외하면 모두 한반도 북부지방이다.
3·1운동은 초반에 서울과 경의선으로 연결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낸 이정은 박사가 쓴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14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276건 중 71.4%인 197건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발생했다.
3·1운동 첫날부터 만세시위를 벌인 도시는 철도역이 있고, 상공업이 발달했거나 큰 시장이 선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북부지방이 3·1운동 초반부터 동참한 데에는 민족대표 기독교 인사 중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길선주는 고향이 평남 안주이고, 김창준은 평남 강서 출신이며,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 저항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3월 1일 서울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이 군집한 평양에서의 준비 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북한 지역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대해 발표한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평양 3·1운동은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이 1919년 2월 9일 이승훈 장로의 소개장을 가지고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를 찾아가면서 태동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판결문에 따르면 이승훈은 2월 12일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와 합작할 것에 합의했고,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활동한 감리교 목사 신홍식은 2월 19일 서울에서 이승훈·박희도·이갑성 등이 참가한 모임에 갔다가 돌아온 뒤 만세운동에 대비했다.
평양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개신교 장로교계와 감리교계, 천도교계가 각각 숭덕학교 운동장, 남산현교회, 설암리 교구당에서 따로 진행했다. 이들은 광무황제(고종) 봉도식을 개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내에서 합류해 행진했다.
김 소장은 "일제 헌병 경찰은 3월 2일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가 8일까지 400명 이상을 검거했다"며 "그중 주동자로 생각한 48명은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했다"고 말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논문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에서 "첫날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종교 연대시위와 종교와 학생 간의 연대시위 방식은 이후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북부지방이 초반부터 3·1운동에 참여한 데 대해 "사전에 주동자들의 조직과 준비가 있었다"며 "민족대표의 영향력과 역할도 다른 지역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성주현 숭실대 교수는 평남 강서·맹산, 황해도 수안에서 벌어진 3·1운동을 분석해 "공세적 만세시위는 3월 초에 집중됐으며, 식민지배의 첨병 역할을 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 헌병을 살해했다"면서 초기부터 시위가 폭력적인 면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독립기념관이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사전'이 기술한 지역별 3·1운동 특징을 보면 평안도는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가 일단 쇠퇴하는 듯했으나 다시 터져 나오는 간헐적 양상을 띠었으며, 함경도는 기간이 중남부 지방처럼 길지는 않았어도 한 번 일어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강인성을 보였다. 황해도는 장기간 면면히 이어지는 끈질김이 특징이었다.
지방의 3·1운동에 대해 연구해온 이정은 박사는 책 '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서 3·1운동을 전기(3월 1∼11일), 중기(3월 11∼25일), 후기(3월 26일∼4월 10일)로 나눈 뒤 황해도·평북·평남은 초기에 시위기 집중됐고, 함남은 중기에 민중의 힘이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는 조선시대에 시행된 간접적 규제 방식의 지방통치를 직접적 규제로 전환해 향촌의 자율성을 해체했다"며 "3·1운동은 일원적·수직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일제에 대해 지방사회가 전면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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