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세계 토착어의 해' 여는 영화 '말모이'
(서울=연합뉴스) 201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토착어의 해'(International Year of Indigenous Languages)다. 유엔은 1957년 '국제 지구 관측의 해'를 시작으로 해마다 지구촌의 주요 현안을 주제로 한 세계년(International Year)을 제정, 국제사회의 관심을 일깨우고 인류의 공동 노력을 호소해왔다. 2015년은 '흙의 해'이자 '빛의 해', 2016년은 '콩의 해', 2017년은 '국제관광의 해'였고, 2018년은 세계년을 정하지 않았다.
말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문화·역사·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통신의 발달 등으로 인해 세력이 큰 언어의 지배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소수 언어는 급격히 힘을 잃거나 사라지고 있다. 최근 디지털 기술이 보급되면서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유엔은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토착어를 보존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자 내년을 토착어의 해로 선포한 것이다.
성경 번역을 위해 소수 언어를 연구하는 기독교 언어학 봉사단체 국제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지구상 언어는 7천97개에 이른다. 인구 103만 명에 한 개꼴인데 인류의 80% 이상은 1.3%에 해당하는 92개만을 제1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불과 200∼300개 언어만이 교육과정과 공공 분야에서 통용되고 디지털 세상에서 쓰이는 언어는 100개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별 사용 인구는 표준 중국어가 13억 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스페인어·영어·아랍어·힌디어(인도)·벵골어(방글라데시)·포르투갈어·러시아어·일본어·란다어(파키스탄)·자바어(인도네시아)·터키어 순이다. 한국어는 남북한과 중국·러시아 일부 등 6개국에서 7천720만 명이 쓰는 것으로 집계돼 2017년보다 한 계단 내려앉은 13위였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각각 14위와 15위에 랭크됐다.
반대로 언어의 96%는 세계 인구 중 고작 4%만이 쓰고 있다. 사용 인구가 100명도 안 되는 소수 언어는 500개 정도 되고 사용자가 없어 이미 소멸한 언어도 200개가 넘는다. 소멸 중인 언어는 약 900개, 소멸 위기에 놓인 언어가 약 1천500개로 추정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는 언어 가운데 절반가량이 몇 세대 안에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유네스코는 '위험에 빠진 세계 언어 지도'(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에서 소멸 위험 언어를 하양(취약)·노랑(확실한 위험)·주황(심각한 위험)·빨강(치명적 위험)·검정(소멸) 다섯 단계로 나타냈다. 기준은 사용 인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세대 간의 전승과 단절이다. 2010년판 지도에는 제주도가 네 번째 단계인 빨강으로 표시됐다. 제주 방언(제주어)을 노령인구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07년 '제주어 보전 및 육성 조례'를 공포한 데 이어 2014년 '제주어 표기법'을 제정해 제주어 지키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관광해설 표지판과 관광안내 책자 등에 제주어를 병기하는가 하면 제주어 강좌를 개설하고 제주어 간판 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인터넷 환경에서 아래아(ㆍ) 등 제주어를 표기할 수 있도록 컴퓨터 지원 체계를 마련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들이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을 세우려고 하자 신은 언어를 각기 다르게 쓰게 만들어 탑 건설을 방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언어학자 피터 뮐호이저는 언어의 다양성을 신의 징벌인 소통의 장애물로 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 언어가 사라지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지혜와 정체성이 함께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누이투(에스키모)족 말에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20가지나 된다. 뉴기니의 한 부족도 어떤 나무의 잎을 쓰임새에 따라 12가지로 다르게 부른다. 제주 토박이들도 제주어에는 표준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의 감성과 독특한 뉘앙스가 있다고 한다. 만국 공용어 에스페란토를 창안한 자멘호프도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쓰고 다른 민족 간에는 에스페란토를 쓰는 1민족 2언어주의를 채택했다.
1999년 유네스코는 2월 21일을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제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서파키스탄의 공용어 정책에 반대한 동파키스탄의 학생과 시민이 1952년 2월 21일 항의시위를 벌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숨진 것을 기리는 것이다. 벵골어를 지키려는 동파키스탄 주민의 의지는 분리 독립 투쟁으로 이어져 1971년 방글라데시란 이름의 신생국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도 민족의 언어를 지키려 한 투쟁의 역사가 있다. 일제는 1938년부터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가 하면, 한글 신문을 폐간했다. 내년 1월 9일 개봉하는 유해진·윤계상 주연의 영화 '말모이'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국어학자들이 사전을 만들어 우리말을 지키려고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한국계 미국인이나 재일동포 2세·3세가 한국어를 못하는 걸 보면 "부모가 자식 교육 잘못 시켰군"이라며 혀를 끌끌 차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결혼이주여성 가운데 상당수는 시부모나 남편의 반대로 자녀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못한다. 생업이나 집안일에 바쁘고 교재를 구하기도 힘들다.
다문화가정 자녀를 글로벌 인재로 길러내려면 어릴 때부터 이중언어를 배우고 부모 나라 문화를 함께 익히도록 해야 한다. 외가나라 문화는 어머니의 토착어(모어)로 온전히 전해줄 수 있다. 어머니와 자녀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자녀의 성장 발달이나 정서 함양에는 물론 어머니의 심리 안정과 가정의 화목에도 필수적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내년 4월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과 인근 거리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 함께 세계 토착어의 날 기념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제주어를 비롯한 소수어 합창 공연, 교육과 전시, 제주어 홍보, 시민이 참여하는 벽화 그리기, SNS 이벤트를 통한 선물 잔치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토착어와 모어의 소중함이 널리 알려지고, 결혼이주여성들이 아기를 품에 안고 모국어로 동화책을 읽어줄 기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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