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독립유공자 베델 선생의 유품, 한국으로 돌아온다

입력 2018-12-23 18:25
영국인 독립유공자 베델 선생의 유품, 한국으로 돌아온다

손녀가 보관하던 장식장·사진·엽서 등 한국정부에 기증키로

국가보훈처, 손녀 자택에 해외 독립유공자 1호 명패 달아



(스폴딩[잉글랜드]=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영국 수도 런던에서 북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링컨셔주 스폴딩.

영국의 겨울 날씨답지 않은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던 지난 22일(현지시간) 넓은 들판과 목장 등이 펼쳐진 이곳에 자리 잡은 한 시골 농가를 찾았다.

농가 안 거실에는 한국 전통 문양 등이 새겨진 오래된 장식장이, 그 위에는 20세기 초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 시절 찍은 색이 바랜 흑백사진 여러 장과 사진첩, 엽서 등이 놓여있었다.

이곳은 영국 출신 독립운동가로 지난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한국명 E.T 배설) 선생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 여사가 사는 곳이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베델 선생은 32세가 되던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으로 내한해 정착했다.

선생은 일제 침략과 잔혹한 탄압을 보고 민족지도자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해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는 등 항일 언론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일제 사전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일제 황무지개간권에 반대했고,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무효를 알렸으며, 고종황제의 친서를 영국 '트리뷴'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는 등 일제의 강압적인 침략상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베델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영국에 베델 선생의 추방을 요구했다.

과로에다 추방 소송에 따른 영향이 겹치면서 건강이 악화된 베델 선생은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베델 선생은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0명으로 영국인은 베델 선생을 포함해 무역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를 지원한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등 모두 6명이다.

이날 자택을 방문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만난 블랙 여사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한국인 조문 행렬이 1마일(1.6km)이나 이어졌다고 한다"고 전했다.

블랙 여사의 집에 놓여있던 장식장은 베델 선생의 부인이자 블랙 여사의 할머니인 메리 모드 베델 여사가 베델 선생의 사후 영국으로 돌아올 때 함께 옮긴 것이다.

베델 여사는 남편이 숨지자 3개월 뒤 아들 허버트 오언과 함께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식장 위에 놓여있던 사진첩에는 베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양기탁 선생의 사진이 선명한 모습으로 들어있었다.

베델 선생이 한옥 앞에서 모자를 쓴 채 포즈를 취한 사진은 아들이자 블랙 여사의 아버지인 허버트 오언이 늘 침대 맡 탁자에 두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블랙 여사는 할머니와 부모님에 이어 자신이 보관하던 장식장과 사진첩 3권, 사진 10장, 엽서 20장 등을 한국정부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기증하기로 했다.

여러 장의 사진 중에는 베델 선생이 직접 찍거나 모은 사진, 사진에 남긴 글도 포함됐다.

앞서 블랙 여사는 소중히 보관해 온 베델 선생의 유품을 한국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고, 이날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직접 방문해 기증 협의를 했다.

개인이 100년이 넘은 유품을 계속해서 보관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한국 정부가 잘 관리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줄 것을 희망한다는 설명이다.

블랙 여사는 "우리 가족에게 매우 귀중한 유품이지만 한국인들이 할아버지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을 생각했을 때 이를 기증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기증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학술연구 등을 위해 베델 선생의 후손을 만난 이들이 베델 선생의 관에 사용했던 태극기, 일본 헌병을 막기 위해 베델 선생 자택에 게양했던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 등을 전달받았고, 현재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에 기탁돼 있다.

보훈처는 내년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블랙 여사를 한국으로 초청, 정식 기증 협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아울러 이번에 기증받은 유산을 독립기념관 등에 전시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이날 블랙 여사의 집에 한글이 새겨진 독립유공자 명패와 함께 이에 관한 설명을 담은 철제판을 달았다.

앞서 보훈처는 포스코 후원으로 7천600개의 독립유공자 명패를 만들어 전달키로 했다.

이낙연 총리가 지난달 광주 남구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노동훈(92) 씨의 집을 찾아 국내 1호 문패를, 피 보훈처장이 이날 블랙 여사의 자택에 해외 1호 문패를 각각 달았다.



피 보훈처장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설레였다. 귀중한 유산을 기증해주신다고 해서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베델 선생과 한국과의 인연이 원활히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이번 영국 방문에서 블랙 여사의 자택 외에도 베델 선생의 생가로 추정되는 브리스틀의 한 주택을 찾아 관련 자료를 확인했다.

1860년대 건축된 이 건물은 현재 원형이 보존돼 있는 상태다.

보훈처는 전문가 고증 등을 통해 생가로 확인될 경우 국외 시설로 등록하고, 표지물을 설치해 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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