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걸렸는데 돈이 없어"…소주 훔친 노인에 손내민 경미범죄심사

입력 2018-11-29 07:00
"암걸렸는데 돈이 없어"…소주 훔친 노인에 손내민 경미범죄심사

"무조건 형사입건하는 관행서 벗어나 선처로 법 집행 신뢰 높여"



(전국종합=연합뉴스) #1.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던 A(80) 할머니는 지난해 7월 경남 창원시 한 주택 앞에서 종이 상자 하나를 주웠다.

빈 상자치고는 무거워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조명등 하나가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조명등을 길바닥에 버리고서는 상자만 챙겨 떠났다.

알고 보니 이 상자는 조명업자가 고객에게 택배를 보내기 위해 잠시 집 앞에 둔 것이었다.

조명등도 50만원에 달하는 것이었다.

택배 상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조명업자는 경찰에 신고했고, 할머니는 결국 붙잡혔다.

폐지인 줄 알고 상자를 들고 갔다가 처벌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할머니는 경찰에 "폐지로 착각해 들고 갔으니 자식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경찰은 할머니를 경미범죄심사위원회에 넘겼다.

심사위원들은 고의가 아니었고 피해자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할머니를 훈방 조처하기로 했다.



#2. 지난달 22일 울산 남부경찰서로 누군가 소주 2병을 훔쳐갔다는 음식점 주인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이 출동해 음식점과 주변 폐쇄회로(CC)TV를 확인해보니 노인 1명이 음식점 창고에서 소주 2명을 훔쳐 비닐봉지에 담아 나가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경찰은 주변 상인 등을 상대로 수소문하던 중 주변 길거리에서 CCTV에 찍힌 노인과 인상착의가 같은 B(84)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경찰이 범행 사실을 물으니 할아버지는 "암에 걸려 신변을 비관하던 중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소주를 훔쳤다"고 시인했다.

경찰관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아파 보였다.

B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큰 실수를 했으니 주인에게 사과하고 소줏값을 주고 싶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음식점 주인 역시 처벌을 원치 않았다.

경찰은 전과가 없고 사정이 딱한 점을 고려해 경미범죄심사위원회를 열어 할아버지를 훈방 조치하기로 했다.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입건된 피의자의 사정을 고려해 처벌을 감경하는 경미 범죄 심사제도가 '현대판 장발장 구하기'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제도는 2015년 지방청별 1개 서에서 시범 운영된 이래 현재 전국 경찰서로 확대, 정착했다.

택배를 폐지로 착각해 주운 할머니처럼 고의가 아니거나 소주 한 병과같이 피해 금액이 적은 경우, 또는 전과가 없는 고령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이 이 제도로 전과자가 될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원래 경찰은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 따라 사안이 중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즉결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즉결심판 청구에 대해 경찰의 자의적인 법 집행이라는 비난 등을 우려, 경찰은 즉결심판 청구를 꺼렸다.

이 때문에 경중에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형사 입건하는 관행이 생겼고, 전과자를 양산하고 국민들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법 집행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경찰은 이런 관행을 보완하고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폐단을 막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

경미범죄심사위원회는 경찰서별로 운영된다.

경찰과 민간자문위원으로 구성된 위원들이 모여 피해 정도와 죄질, 기타 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감경 여부를 판단한다.

당사자가 심사위원회에 참석해 변론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에 따라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기준에 부합한다면 형사입건 대상자는 즉결심판으로, 즉결심판 대상자는 훈방으로 처분을 감경해준다.

28일 기준으로 올해 부산지방경찰청은 397명을 경미범죄심사위원회에 올려 97%인 385명을 감경 처분했다.

증손자에게 주려고 마트에서 1만원 어치 과자를 훔친 90대 할아버지가 훈방으로 선처를 받았다.

올해 광주에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차량에서 1천400원을 훔친 20대가 감경받았다.

인천에서는 417명, 대전서 44명, 충남 155명, 제주 39명이 이 제도로 선처받는 등 전국 경찰서에서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전북의 한 경찰관은 "무분별한 전과자 양산을 막기 위한 취지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다고 본다"며 "내부적으로 운용의 묘를 살리려는 논의도 활발하다"고 전했다.

대전 한 경찰관도 "범죄혐의가 경미한 피의자를 무조건 형사입건해 처벌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피의자에게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처로 법 집행 신뢰도를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김근주, 박정헌, 박철홍, 오수희, 손현규, 임채두, 고성식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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