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비운의 시작은 기부금 100엔(종합)
평가액 1%에 떠돌이 생활하다 77년만에 진주로 귀향
(진주=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에 반출됐다가 각지를 떠돈 뒤 27일 점안식(點眼式·불교에서 신앙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의식)을 통해 귀향을 알린 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비운(悲運)의 유물이다.
이 석탑은 미술사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무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神將像)과 보살상을 함께 조각한 점이 특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고(故) 황수영 박사가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펴낸 자료집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에 따르면 석탑은 수백 년 전에 폐사한 범학리 절터에 있었으나, 1910년 무렵 자연스럽게 넘어졌다.
경북지사는 1941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보낸 문서에서 부재 일부는 땅속에 있고, 일부는 지면에 노출됐다고 설명하면서 "동네 주민들은 본래 석탑을 귀찮게 여겼고, 지주도 농사를 짓는 데 방해물 취급을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1940년 11월 무렵 진주에 거주하는 정정도(鄭貞道)라는 인물이 석탑 부재를 구매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반대했다.
정정도는 100엔을 마을회관 건설비로 기부하는 조건으로 석탑 반출 묵인을 요청했고, 결국 주민들은 마지못해 석탑을 넘기기로 했다.
무게가 12t에 달하는 석탑을 절터에서 도로변으로 운반하는 데 동원된 인원은 500여 명. 이어 화물자동차 6대로 진주까지 부재를 나른 뒤 진주에서 대구까지는 철도로 운송했다.
경북지사는 "석탑은 대구부내 오쿠(奧) 골동상에 매각됐다"며 "평가액은 약 1만 엔 정도이지만, 실제 매매 가격은 불분명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기부금 100엔의 용도를 조사하니 67엔 32전은 마을회관 수리비와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잔금은 구장(區長)이 보관 중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당시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석탑을 살핀 뒤 "탑이 해체된 채로 땅 위에 놓였다"면서도 "우수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신라시대 석탑"이라고 기술했다.
평가액 1%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시작된 떠돌이 생활은 77년간 이어졌다.
총독부 박물관은 석탑 존재를 확인하고는 고향인 산청으로 보내지 않고, 서울로 이송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5월에는 미군 공병대가 경복궁 안에 다시 세워 1962년 국보로 지정됐지만, 1994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으로 인해 경복궁이 정비되면서 해체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석탑 부재는 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또다시 수장고에 들어갔고, 경남 지역에서는 이 석탑을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2013년 작성된 석탑 조사 보고서도 "중요 문화재 보존관리의 적정성 도모와 국민 문화재 향유권 신장을 고려해 복원과 전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와 인접한 산청의 대표 문화재 전시를 위해 이관을 요청했고, 지난해 2월 마침내 서울에서 진주로 돌아왔다.
박물관은 암질을 분석해 화강암과 유사한 섬장암으로 탑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범학리 근처 정곡리에 있는 채석장에서 섬장암을 가져와 하대석을 복원했다.
아울러 석탑이 9세기 무렵 범학리 주변 석재로 현지에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규명했다.
석탑이 지닌 학술 가치를 연구한 박물관은 재건 위치를 고민한 끝에 10월 15일 야외전시장에서 복원을 시작해 이날 공사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됐음을 알렸다.
최영창 관장은 "박물관 내부는 지하에 수장고가 있어 (석탑을) 세울 수 없었고, 외부 세 곳을 후보지로 삼았다"며 "박물관이 있던 자리가 과거 계곡부였는데, 가장 안정된 장소가 야외전시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섬장암으로 만든 석탑은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국내에서 유일하다"며 "아픈 사연을 뒤로하고 고향에 돌아온 삼층석탑이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77년 타향살이 국보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고향서 재건 / 연합뉴스 (Yonhapnews)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