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재의 딜레마…'한 방'이 아쉬운 '국가부도의 날'

입력 2018-11-20 06:00
실화 소재의 딜레마…'한 방'이 아쉬운 '국가부도의 날'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실화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는 딜레마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진정성이라는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누구나 아는 스토리를 어떻게 새로운 서사로 변주해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가 지닌 장·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6·25 이후 최대 국난(國亂)이던 외환위기 당시의 고통은 우리 국민의 뼛속에 깊이 새겨졌다. 자연히 국난을 막기 위한 대사는 한 마디는 절규로, 공장 부도를 막기 위한 몸부림은 발버둥으로 관객의 귀와 눈에 박힌다.

아픈 기억을 동반하는 실화의 힘은 무리 없이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고 감정을 들끓게 한다.

그러나 전개 과정과 결말을 뻔히 아는 스토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위기를 앞두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통해 시대상을 담고자 했지만, 각각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나열한 데 그친 인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는 그 속에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춘 드라마를 만들어내야 하지만, '기승결'만 있고 '전'이 빠진 탓에 다소 심심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극장을 찾은 관객이 외환위기 다큐멘터리를 기대하지 않을 것인 만큼 영화적 재미에 더 신경을 썼다면 한층 흡입력 있는 작품이 됐을 듯하다.







시나리오를 쓴 엄성민 작가는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스토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기사에 상상력을 가미해 국가 부도 일주일 전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캐릭터들을 창조한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의 사교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국민의 85%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은 일주일 뒤 국가 부도가 닥칠 것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청와대와 정부는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한 대책팀을 꾸리지만 팀 내부에서부터 내분에 휩싸인다.

한시현은 즉시 위기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와 대척점에 선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은 위기를 비밀로 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위기에 배팅하는 인물도 있다. 잘나가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외국 투자자의 철수, 실물경제의 심상치 않은 징후를 포착하고 국가 부도에 '올인'한다.

반면,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갑수'(허준호 분)는 무방비 상태로 위기에 노출된다. 납품처 부도로 어음이 휴짓조각이 되자 갑수는 파산만은 막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의 대립은 영화의 골간을 이룬다. 약자의 편에 서서 위기를 막고자 하는 한시현과 위기를 기회로 한국 경제의 새판을 짤 것을 주장하지만 뒤로는 사욕을 채우려는 재정국 차관의 대립은 전형적인 선악 구도를 이룬다.

뻔한 대립이지만 김혜수와 조우진의 열연은 구도의 식상함을 상쇄한다. 김혜수는 이지적이고 냉철하지만 뜨거운 열정을 지닌 여성을 연기하며 가장 김혜수다운 모습을 보였다.

조우진 역시 시종일관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김혜수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왜 위기를 알려야 하는데∼"라며 상대를 약 올리듯 말꼬리를 올리는 버릇은 지독하게 얄밉게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국가 위기에 '올인'한 윤정학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그는 달러 사재기부터 시작해 풋옵션(주가가 떨어질 수록 수익이 커지는 금융상품), 강남 부동산 싹쓸이 등 갈수록 판을 키워가며 꼼꼼하게 잇속을 챙기지만, 정부의 무능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서민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갑수'는 영화의 주제의식이 투영된 캐릭터다. 연출을 맡은 최국희 감독은 '갑수'를 외환위기로 고통받은 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주목할 점은 갑수가 겪은 고통보다도 엔딩장면에서 변화한 그의 모습이다.

공장이 부도를 맞이하자 갑수는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베란다 난간에 올라선다. 그 순간 방문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고, 갑수는 난간에서 내려온다. '내가 죽으면 내 새끼들은 앞으로 어찌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다.

이후 갑수는 독하게 마음먹는다. 나보다 남을 위하고 선하기만 했던 갑수는 독하게 IMF를 버텨낸다. 20년 뒤 갑수는 외국인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는 악덕사장이 돼 면접장에 가는 아들에게 "절대로 아무도 믿지 말라"고 당부한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국 정치가 87년 6월 항쟁 전후로 나뉜다면, 한국 경제는 97년 외환위기 전후로 나뉜다.

이미 21년이 지났지만 한국사회는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량해고가 초래한 실업률 급증과 해외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된 금융시장, 극심한 저출산과 양극화는 외환위기가 몰고 온 후폭풍이다.

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 갑수의 변모는 외환위기 이후 인간성과 믿음을 상실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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