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수십조원 동독 '물대기'…동독체제 유지·통일 기반마련

입력 2018-11-18 07:07
서독의 수십조원 동독 '물대기'…동독체제 유지·통일 기반마련

예산철에 '대북 퍼주기' 논란 재현…서독 내부서 동독지원에 비판론도

인프라·금융 지원, 정치범 석방 대가 등으로 동독 경제위기 극복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통일 이전 서독은 동독에 경제적 지원을 어떻게 했을까.

예산철에 '대북 퍼주기' 논란이 다시 벌어지면서 분단국가의 교류 및 통일과 관련해 사실상 유일한 해외 사례인 동서독으로 눈길이 가고 있다.

남북한 간 경제교류 및 협력의 길이 열리면서 당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남북협력기금의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다. 사용 내역의 공개 여부 및 예산 규모가 쟁점이 됐다.

최근에는 지난 9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측의 송이버섯 선물에 대한 답례로 제주산 귤을 전달하는 것을 놓고서도 정치권 일각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향후 남북 교류가 본격화될수록 북한에 대한 지원 문제로 남남갈등이 더욱 첨예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경제적 지원 문제에서 남북한과 동서독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정치·경제적 조건이 다른 탓에 어렵다.

동서독은 남북한과 달리 전쟁을 치르지 않은 데다, 분단 이후에도 인적 왕래 등이 상당했다. 북한과 달리 동독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높기도 했다. 동독 안에 섬처럼 있던 서베를린 때문이라도 교통, 통신 등의 분야에서 동서독 간 교류가 불가피한 측면도 남북한과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동서 교류가 향후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 완화와 이해증진 등 통일의 디딤돌이 된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남북관계에서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서독의 경우도 동독에 대한 경제 지원 및 협력을 놓고 갈등이 있었지만, 충돌 양상은 크지 않았다.



◇ 독일 통일전 18년간 70조 원 이상 지원…민간 차원이 72%

서독은 동서독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철도 건설·보수 비용, 직접 차관, 지불보증 차관, 동독 정치범의 서독 이주 대가에 따른 물품 지원, 서독 주민 차원의 지원, 서독 교회 차원의 지원 등으로 총 1천44억5천 마르크를 동독에 지급했다.

독일연방하원 조사위원회가 서독의 동독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1973년부터 통일을 이룬 1990년까지 18년간을 대상으로 파악한 통계다.

독일 통일로 마르크화의 변동성이 커지기 전인 1987년께 환율을 감안하면 당시 원화로 70조 원이 넘는다.

전체 지원에서 정부 차원은 296억5천억 마르크로 전체의 28%였고, 나머지는 민간 차원의 지원이었다.

반대급부가 없는 일방적인 지원은 서독에 여행오는 동독 주민을 위한 환영금 등 707억 마르크로 전체의 68%를 차지했다.



◇ 분단 직후부터 교류…1969년 동방정책 이후 동독 지원

동서독은 1949년 양측서 정부가 각각 수립된 직후 프랑크푸르트 협정으로 교역의 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동독이 원한 철강과 기계류, 차량, 화학제품, 전자제품 등은 당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을 상대로 무역규제를 한 품목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무역규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하면서 교류가 확대됐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서독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서독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갖고 있었던 탓이다. 대신 서독 정부는 민간기관인 독일 상공회의소 안에 상공신탁처라는 곳을 두고 동독 당국을 상대하도록 했다.

동독에 대한 서독의 경제적 지원은 1969년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해 '동방정책'을 표방하면서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1972년 동서독 간의 기본조약 등이 뒷받침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독 정부는 미국 등 주요 서방국가들을 상대로 동서독 간 거래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서방의 규제를 점점 비켜갔다.

◇ 동독이 고속도로 건설 등 요청…서독내 비판론도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은 동독이 먼저 요청했다. 대표적으로 동독은 1974년 서독과 베를린을 연결하는 철도 및 도로의 보수 사업에 서독의 투자를 제안했고, 서독은 받아들였다.

이후 서독의 마리엔보른과 베를린 간 고속도로 확장에만 서독은 12억 마르크를 부담했다. 동독도 1억 마르크를 들여 서독의 현대식 건설장비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서독 측이 비용을 부담하기로 한 과정에서 서독 내부에 논란이 일었다.

건설경험이 없던 동독 측에 건설을 일임하기로 한 데 대해 비판론이 일었고 지출이 과다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동독은 반대급부로 서독의 산재연금수령자가 동독을 방문할 경우 최소의무환전을 면제해줘 개개인의 부담을 덜도록 했다. 또, 더 많은 정치범을 서독으로 보냈다.

동독의 정치범들을 서독이 대가를 지급하고 데려오는 것은 프라이카우프로 불렸다. 이에 들어간 비용만 34억4천만 마르크에 달했다. 양측 정부 간 직거래가 아니라 서독의 교회가 동독에 물품을 공급했다.

이 역시 정치권 내부에선 동독의 체제를 유지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프라이카우프를 실시하는 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서독은 1980년대에 매년 8억 마르크 이상의 무역신용을 동독에 제공해 동독이 외화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서독은 서독지역과 서베를린 간의 통행로를 이용하는 통행세와 우편료 등에 매년 8억∼10억 마르크를 동독에 제공했다.

서독은 1984년 동독이 1천400㎞에 달하는 양측 국경지대에서 자동화기를 철수하고 지뢰를 제거하는 대가로도 10억 마르크의 신용대부를 제공했다.

서독 교회는 분단 직후부터 통일 직전까지 꾸준히 동독 교회를 지원했다. 생필품부터 건축자재, 의료기기 지원까지 이뤄졌다. 동독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과 양로원 등도 지원대상이었다.



◇ 경제교류도 활발…동독의 서독 의존도 높아

동서독 간의 교역도 분단 기간 활발히 이뤄졌다. 양측 간 거래에서는 서독에 대한 동독의 의존도가 높았다.

서독의 경우 대외무역에서 동독과의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5년 2.3%, 1987년 1.5%였다. 반면 동독은 1955년 12.3%, 1987년 7.6%에 달했다.

양측 간 거래액은 1955년에 비해 1987년에 12배 증가했다. 1986년 기준으로 서독은 연간 78억 마르크 상당을 동독에 수출했다. 동독의 대(對)서독 수출도 73억 마르크에 달했다.

동독 입장에서 서독은 소련에 이어 두번 째 교역 상대국이었다.

동독은 서독을 통해 서유럽의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에 관세 장벽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일부 EC 회원국들은 이를 지적했으나 서독의 묵인 속에서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 동독의 교역에서 서방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달했다.

사실상 서독이 경제적 지원과 교역을 통해 동독에 '물대기'를 한 셈이다. 동독 경제가 무리없이 돌아가면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기반을 서독이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독 입장에서는 경제적 의미가 크지 않았으나 민족적 유대감 유지 및 적대감 완화, 동독 주민들의 호감 유발 등 정치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당시에도 서독에서는 이런 명분으로 대내적인 설득이 이뤄졌다.

현재도 독일 통일 전문가로 활동 중인 데트레프 퀸 전 독일문제연구소장은 1985년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의견을 나타냈다.

그는 "동독의 첫번 째 관심은 공산체제의 안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서독의 경제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라며 "서독의 입장은 통일을 향한 긴 안목에서 동족 간의 이질화를 막고 인도적인 측면에서 독일인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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