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포퓰리즘 파고 맞서 '평화의 사도' 행보 가속화

입력 2018-11-12 00:34
마크롱, 포퓰리즘 파고 맞서 '평화의 사도' 행보 가속화

정상 70여명 초청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 파리평화포럼 잇달아 개최

"1·2차대전 전간기와 현 정세 흡사" 경고…세계평화 위한 개방·다원주의 역설

낮은 국내지지율에 발목 잡힐 우려…유럽의회 선거 여론조사서 극우에 1위 내주기도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을 파리에서 대대적으로 열어 다시 한 번 자신이 서구 자유주의 진영의 '적통'이자 포퓰리즘 물결에 맞서 평화 논의를 주도하는 리더임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100년 전 제국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충돌해 인류 최초의 총력전으로 비화한 1차대전의 의미를 되새기며 합리적 중도정치 노선과 다원주의, 개방 등의 가치를 역설하는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마크롱은 11일 오전(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전 세계 70여 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 개선문에서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을 주최했다.

그는 연설에서 정상들을 마주 보며 "역사는 때로는 조상들이 피로 맺은 평화의 유산을 뒤엎고 비극적 패턴을 반복하려 한다"며 "배타적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정반대로, 낡은 망령들이 혼돈과 죽음의 씨앗을 뿌리려 되살아나고 있다"고 경각심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지 말고 희망을 건설해나가자"고 당부했다.

마크롱은 오후에는 파리 시내 라빌레트 전시관에서 '파리평화포럼'을 주최, 세계평화·다원주의·개방경제·민주주의·언론자유 등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포럼은 1차대전이 끝나고 서구 열강이 파리에 모여 전쟁배상문제와 전후질서 구축, 세계 평화를 논의한 파리평화회의(1919∼1920)를 염두에 두고 만든 논의의 장으로, 마크롱은 이 포럼을 연례행사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해온 트럼프 미 대통령은 포럼 불참을 통보했다. 마크롱이 기획한 이 포럼이 자신의 지향과 맞지 않는다고 보고 불참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은 앞서 지난 4일부터 1차대전 100주년 기념주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갖고 포퓰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에 맞서는 지도자임을 부각하고 있다.

그는 4∼10일 프랑스 북부와 동부의 1차대전 주요 격전지 14곳을 연쇄 방문하는 강행군을 했다.



적국이었던 독일과 국경을 맞댄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과 함께 기념콘서트에 참석하며 종전 100주년 일정을 시작했고, 격전지를 차례로 방문해 전쟁의 참상을 곱씹고 희생자를 추모했다.

10일에는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이 맺어진 파리 근교 콩피에뉴 숲 열차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함께 방문해 손을 맞잡고 세계 평화와 유럽의 번영을 다짐하기도 했다.

마크롱의 종전 100주년 행보는 단순히 희생자 추모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의 어리석음이 충돌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전쟁을 다시는 겪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마크롱의 가장 큰 목표다.

전 세계에서 발흥하는 포퓰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 보호무역의 물결에 인류가 경각심을 갖고 대처하지 않으면 과거의 참화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마크롱은 작금의 세계정세가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전간기(戰間期) 세계정세와 매우 비슷하다고 본다.

최근 일간 웨스트프랑스와 인터뷰에 그는 "지금 상황은 전간기와 매우 흡사하다. 공포로 분열된 유럽이 국수주의로 퇴행하고 경제위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명철한 머리로 어떻게 이런 흐름에 저항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크롱은 그동안 극단적 포퓰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대항하며 합리적 중도정치 노선과 개방경제, 포용·인권 등의 가치를 역설해왔다.

그는 미국이 탈퇴한 파리기후협정과 이란 핵합의 유지를 위해 나머지 서방국들을 규합해 기후변화와 핵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

무엇보다 마크롱은 작년 대선에서 극우 후보를 꺾고 집권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포퓰리스트들이 유권자들의 비이성적인 공포심을 조장해 득세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요즈음 마크롱의 행보에서는 수년 전부터 세계를 흔드는 포퓰리즘을 내버려둘 경우 강대국 간 충돌로 이어져 인류가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다시 빠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 읽힌다.

특히 마크롱은 도널드 트럼프 집권 후 미국이 보이는 세계의 '균형자' 역할 포기에 주목한다.

1·2차대전의 서유럽 동맹국이었고 2차대전 후 마셜플랜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유럽의 재건을 돕고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닦은 미국은 트럼프 집권 이후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전통적 동맹국들에 안보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가 하면, 유네스코 등 주요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는 등 일방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결정으로 휘청거리고, 든든한 우군이었던 독일의 메르켈 총리마저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서방 강대국 지도자 중 다원주의와 개방, 대화와 관용 등의 가치를 실효성 있게 밀고 갈 리더는 사실상 마크롱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처럼 마크롱의 합리적 중도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평화 논의는 국내에서 바닥을 치고 있는 그의 낮은 국정 지지도에 발목이 잡힐 위험이 있다.

마크롱은 권위주의적 리더십 논란, 보좌관의 시민 폭행 스캔들, 주요 각료와의 불화, 동시다발적 개혁 추진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인해 현재 국정지지율이 20%대로 추락했다.

내년 봄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의 중도정당 '라 레퓌블리크 앙마르슈'(LREM·전진하는 공화국)가 극우 국민연합(RN·'국민전선'의 후신)에 1위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충격적인 여론조사가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는 마크롱 집권 뒤 사실상 처음으로 거치는 일종의 '중간평가'로, 프랑스의 다른 야당도 아닌 극우정당 RN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은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마크롱의 집권당이 내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진영에 패배하고 마크롱의 중도개혁 노선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계속 늘면 2022년 대선 재선에도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

차기 대선에서 마크롱에 필적할 만한 야권 후보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잠재적 주자군에서는 르펜과 멜랑숑 등 극단적 포퓰리즘 성향의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만에 하나 차기 대선에서 프랑스마저 포퓰리즘 진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유럽은 물론 세계 전반의 정치지형에 불확실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세계에서 보호무역과 폐쇄, 미국 일방주의를 골자로 한 '트럼피즘'(트럼프주의)의 물결이 거센 상황에서 자유주의·개방경제·인권·다원주의 등을 내세운 '마크로니즘'(마크롱주의)이 얼마나 견고히 영향력을 확보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크롱은 이와 관련해 지난달 한 기자회견에서 "극우는 프랑스에서도 전력을 다하고 있고, 이는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라면서도 "이런 것이 나를 걱정스럽게도 하지만 동기부여도 된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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