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에 출전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던 이택근의 한마디
"최고참인데 벤치클리어링 못나갔을 때 답답해…후배들 고맙고 찡하고"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 넥센 히어로즈의 구심점인 이택근(38)은 2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앞두고 전 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탁 한 가지를 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국시리즈에 꼭 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SK를 꺾고 꼭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자는 독려이자 간청이기도 했다.
이택근의 요청은 거의 이뤄질 뻔했다.
4-9로 끌려가던 9회초 넥센이 송성문의 2타점 2루타와 SK 2루수 강승호의 실책으로 3점을 따라붙고, 거포 박병호의 드라마틱한 2사 후 동점 투런포로 9-9를 이루자 이택근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흐름을 뒤집은 넥센은 연장 10회초 1점을 추가해 10-9로 앞서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아웃 카운트 3개를 남겼다.
그러나 SK는 KBO리그 대표 홈런 군단이었다. 연장 10회말 김강민의 홈런으로 다시 동점을 만들더니 곧바로 한동민의 굿바이 홈런으로 경기를 끝냈다.
귀신이 지배한 듯한 경기 막판의 상황이 SK의 최종 승리로 마무리되자 이택근의 2018시즌도 끝났다.
이택근의 통산 4번째 한국시리즈 출전도 물거품이 됐다.
정규리그 최종일인 지난달 13일 이택근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루로 뛰던 중 넘어져 오른쪽 갈비뼈를 다쳤다.
4주 진단을 받은 통에 와일드카드 결정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이택근은 경기 중 벤치에 앉을 순 없지만, '응원단장'으로 선수단과 동행하며 후배들을 격려했다.
장정석 넥센 감독은 이택근에게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반드시 넣을 테니 준비하라며 출격 명령을 내렸고, 이택근은 스윙 훈련으로 재빨리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수비는 어렵지만, 대타로는 출전할 만큼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이택근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포스트시즌에서 감동의 레이스를 마친 후배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최고참의 올해 마지막 임무를 마쳤다.
경기 전 만난 이택근은 "여기까지 온 우리 후배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해준 후배들에게 고맙고, 가슴 찡하다"고 했다.
그는 또 "구단에서 계속 날 필요로 하고, 내가 뛰어야 하는 상황이면 모를까 무섭게 성장하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줄 것"이라며 공백을 무색게 하는 젊은 선수들의 투지를 높게 평가했다.
내년까지 히어로즈 선수로 뛰는 이택근은 현역 연장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친정 히어로즈에서 지도자로 후배들과 계속 호흡하는 멋진 일을 머릿속에서 서서히 구상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오프 1·2차전에서 SK와 넥센 선수들은 위협구와 강력한 슬라이딩 때문에 이틀 연속 벤치클리어링을 빚었다.
벤치에 못 앉는 대신 로커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이택근은 "팀의 최고참인데 벤치클리어링 때 나갈 수 없어 답답했다"고 했다.
가장 앞장서 싸울 수도 있지만, 최고참의 몫은 흥분한 후배들을 진정시키는 일이다. 엔트리에서 빠져 그 책무를 못 한 것을 이택근은 자책했다.
KBO리그에서 16년을 뛴 베테랑답게 그의 '촉'은 무섭게 적중했다.
5차전을 앞두고 "솔직히 저쪽(SK)이 유리한 것 아니냐"며 "우리는 많이 지쳤고, 홈런이 많이 나오는 인천이라는 변수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이어 "박병호와 SK 한동민의 홈런이 꼭 터질 것이다. 병호는 그간 터지지 않았으니 앞으로 무섭게 (홈런이) 터질 것이고, 한동민은 4차전에서 홈런을 쳤기에 또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작두를 탄 이택근의 예감처럼 박병호와 한동민은 나란히 대포를 터뜨려 역대급 명승부를 연출했다.
장정석 넥센 감독은 포스트시즌 내내 이택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기량은 둘째치고 벤치에서 이택근의 무게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택근과 이정후가 뛰었다면, 최원태도 던졌다면'과 같은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넥센의 가을이 햇살만큼이나 눈 부셨기에 부상으로 이탈한 세 선수의 빈 자리가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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