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돌아온 한국 공포영화의 전설 '여곡성'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야심한 밤. 이 대감은 정경부인 '신 씨'가 내온 국수로 출출한 배를 달랜다. '후루룩' 면발을 넘기던 이 대감이 "입안이 텁텁하다"며 표정을 찡그린다.
1986년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던 관객은 경악했다. 이 대감이 국수 대신 지렁이를 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CG도 없던 시절이다. 당시 이 대감 역을 맡은 배우 김기종은 실제 지렁이를 입에 물고 촬영했다.
'지렁이 국수'라는 명장면으로 한국 공포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여곡성'이 22년 만에 리메이크됐다.
원작의 스토리 라인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지만 요즘 사극 영화의 트렌드에 맞게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색채를 덧입혔고, 원작에 없던 '해천비'라는 무당 캐릭터가 추가됐다.
이 대감은 한양에서도 내로라하는 권세가의 가주다. 그러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신혼 첫날밤 비명횡사하고 만다. 정경부인 신 씨는 악귀의 소행임을 짐작하고 셋째 아들 명규를 절로 피신시킨다.
신 씨는 명규와 사주가 같은 하인을 새로 들인 몸종 '옥분'과 혼인시켜 귀신을 속이려는 계책을 준비한다. 그러나 명규는 귀신을 없앨 수 있는 검을 찾았다며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옥분과 첫날 밤을 보낸다.
악귀를 처치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명규는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러나 단 한 번 명규와 잠자리를 같이한 옥분은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이 대감 댁 셋째 며느리로 인정받아 귀신들린 집에 머무르게 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신 씨 부인' 역을 맡은 서영희와 '옥분' 역을 맡은 손나은이 극을 이끌고 가는 투톱 영화다.
'궁녀', '추격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마돈나' 등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인 서영희는 아직 30대임에도 서늘한 표정 뒤 욕망을 감춘 중년 대감마님 역을 소화해냈다.
카운터파트인 손나은의 영화 연기 경험이 부족한 만큼 서영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중책을 완수했다. 극 초반 철저하게 집안에 군림하는 대감마님의 모습부터 중반 이후 자애로운 시어머니의 모습까지 능수능란하게 연기한다.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 출신의 연기자 손나은은 사실상 영화 데뷔인 점을 고려하면 무난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특히 청순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외모와 한복의 조합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다만, 영화의 완성도가 아쉽다. 공포영화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은 것이 문제. 갑자기 튀어나오는 여자 귀신은 관객을 놀라게 하지만 공포와는 거리가 있다. 'B급 영화'를 연상케 하는 분장 수준도 눈에 거슬린다.
원작의 명장면인 '지렁이 국수' 신은 CG의 힘을 빌려 무난하게 재현했지만 원작과 같은 충격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대감 댁에 있던 '옥분'이 갑자기 집 밖으로 나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동'도 곳곳에 존재한다.
참신함이 돋보이는 장면도 있다. 신 씨 부인과 옥분이 어둠 속에서 교차하는 장면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 사극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화면을 연출해냈다.
유영선 감독은 "원작이 워낙 유명해 부담이 됐다"며 "원작의 스토리텔링은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캐릭터에 현대적인 감성을 붙여 원작을 모르는 분도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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