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 "영화 속 아이러니들, 사실은 우리 일상"
신작 '군산:거위를 노래하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군산에 막 도착한 윤영(박해일 분)과 송현(문소리)은 일본식 가옥인 민박집에 짐을 푼다.
송현은 과묵한 민박집 사장(정진영)에게 끌리고, 이에 토라진 윤영은 자기 곁을 맴도는 민박집 딸(박소담)에게 관심을 갖는다.
장률 감독의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11월 8일 개봉)는 군산으로 여행 온 두 남녀의 엇갈린 연애감정과 소소한 일상을 따라간다.
남자는 여자를 '누나'라 부르고, 여자는 남들에게 '우리는 친구 사이'라고 소개한다. 둘이 어떤 사이인지, 왜 군산에 왔는지는 처음엔 알 수 없다. 이야기는 거두절미한 채 중간부터 시작해 결말로 치닫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제목은 중반에 스크린에 뜨고,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은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장률(56) 감독은 이런 독특한 구성에 대해 "영화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찍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찍는 것"이라며 "우리 기억은 순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중간 부분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중간을 생각하다 '아 앞에서는 이랬지, 뒤에서는 이랬지'하고 떠오르죠. 영화를 찍는 방식도 그런 일상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의 일상을 가장 가깝게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데뷔작 '당시'(베이징)부터 '경계'(몽골), '중경'(충칭), '이리', '두만강', '경주' 등 특정 지역의 공간에서 받은 인상과 흔적을 스크린에 녹여낸 장 감독은 이번에는 군산의 독특한 정취를 담아낸다.
군산에는 일본식 옛 가옥과 정원, 기차가 다니지 않은 철길 등 193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미군 비행장에서 들려오는 전투기 굉음이 수시로 들려온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혼재된 곳이다.
장 감독은 "사람은 공간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서 "어떤 공간에 가면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할지,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할지가 떠오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쓴다"고 했다.
영화에는 경계인으로 산 장 감독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중국 옌볜에서 나고 자란 재중동포 2세다. 극 중에도 재중동포(조선족)를 비롯해 재일교포, 화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뿌리가 같은데도 정착한 지역에 따라 재중동포, 재일교포로 등으로 나눠 부르며 차별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우리 사회 풍토를 꼬집는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송현은 시위에 나가 중국 동포의 인권 향상을 부르짖지만, 막상 자신이 '조선족'으로 오해받자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윤영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옌볜 출신 가사도우미 이름도 몰랐다가 윤동주 시인의 먼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호들갑을 떤다.
장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면서 "그저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선족을 여러 '관점'으로 대하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족을 만나면 어색해하기도 하고, 또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분들을 무시하기도 하죠. 그게 일상입니다.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이 너무 일상을 벗어나 큰 흐름만을 보는 것 같은데, 그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요."
주인공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인물들이지만, 사실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다. 전직 시인이자 사실상 백수인 윤영은 그만의 세계에 머무는 듯하다. 아픈 사연을 지닌 민박집 사장은 풍경 사진을 찍으며 과거에 머물러 있고, 자폐증이 있는 민박집 딸은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외부와 소통에 목말라한다. 송현은 개인사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만, 가끔 자기 리듬에 멈춰있는 사람들도 있죠. 마치 시인처럼요. 제 딴에는 자기 리듬에 맞춰 진지하게 살아가지만, 시대의 흐름에서 볼 때는 어색한 사람들이죠. 저는 그런 사람들이 더 눈에 잘 들어옵니다."
영화 속에는 아이러니한 장면들도 많다. 고즈넉한 일본식 정원을 보여주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보여주는 길거리 사진전을 비추는 식이다. 일본식 가옥에서는 독립운동 기념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장 감독은 "일부러 연출한 것이 아니라 촬영 중에 실제 열린 음악회 행사를 카메라에 담았다"면서 "그 역시 우리의 일상"이라고 말했다.
장 감독은 과거 차가운 시선으로 암담한 현실을 꿰뚫는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그러나 최근작들은 훨씬 경쾌해지고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장 감독은 "저도 이제 많이 늙어서 그런 것 같다. 아직 꼰대로 가지는 않은 것 같다"며 웃었다.
지난 6년간 한국에서 머물며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화학 교수를 지낸 장률 감독은 최근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0년 정도 중국에서 작품을 못 찍었다"면서 "중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어서 최근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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