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김사인 원장 "우수한 번역인력 양성은 국가적 과제"

입력 2018-11-04 09:00
[묻고 답하다] 김사인 원장 "우수한 번역인력 양성은 국가적 과제"

"번역인력 기르기 위해 긴 시간 꾸준히 밑불 지펴야"

"시공간적 확장을 통한 한국문학의 정체성 재정립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은주 논설위원 = "우수한 번역인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습니다. 긴 시간 꾸준히 밑불을 지펴야 합니다."

한국문학번역원 김사인 원장은 "번역인력 양성은 번역원이라는 작은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와 관련되는 문제"라며 "번역원 부설 번역아카데미를 대학원대학처럼 공인되고 규모를 갖춘 교육기관으로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장기적으로 한류의 종점, 한류의 기초는 문학"이라고 전제하고, "번역원의 임무는 소극적으로 번역출판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국제교류 본부로서 적극적으로 다양한 차원과 수준의 문학 외교를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임기 중 어디에 중점을 둘 계획인가.

▲ 한국문학의 시공간적 확장이다. 정관상 번역원의 목적은 '한국문학의 발전 및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번역원은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하나라도 더 해외에 소개해야겠다는 급급함에 쫓기다시피 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로 40개 언어권에 1천500종 가까운 책을 번역해냈다. 이쯤에서는 도대체 한국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국문학인지, 또한 한국문학이어야 하는지, 근원적인 물음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방향을 정립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문학이라고 하면 암암리에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문학동네 등 서울 중심의 엘리트 문단 문학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어로 문학행위를 하는 것이 남한만이 아니다.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창작들, 해외동포 문학 등에 대해서 일정한 책임감을 가지는 토대 위에서 번역원의 사업 방향이 정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이민 2~3세들이 현지어로 쓴다고 해도 그 안에 담겨있는 주제나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은 한국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에까지 깨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한국문학의 온전성,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시, 소설 등은 100여년 전 서양 근대문학의 척도가 수입되면서 이 땅에 주류적인 문학 양식으로 정착됐다. 그 이전 한반도에서 한민족에 의해 이루어진 창조적인 글쓰기, 오늘날 서구식 장르 개념으로는 포착이 안 되는, 예를 들어 시조, 가사 같은 것들까지도 적극적으로 포괄해야 한다.

-- 한국문학의 공간적 확장의 의미는.

▲ 남북을 함께 아우르고,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어 문학, 해외동포들에 의해 현지어로 만들어지는 문학을 아우를 수 있는 시야와 논리가 확보돼야 한다고 본다.

북한문학도 상투적 체제선전 문구만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표방했던 가치들이나 미학, 이것이 우리 감각에는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지만, 어떤 좋은 삶, 좋은 세상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했던 다양성의 하나로 포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서방세계에서 북한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고조돼 있다. 우리가 북한문학에 대해 전문가도 없고,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서방이 자체적으로 북한문학 앤솔로지(선집)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서방에서는 남과 북이 전혀 다른 문학으로 정리된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를 들어, 남쪽의 박경리, 북쪽의 홍명희, 이기영, 옌볜의 김학철, 일본의 김석범, 미주의 이창래, 이민진처럼,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진폭의 다양성을 모두 아우르는 문학사는 장엄하다. 한국문학의 볼륨이 이쯤으로는 상상이 되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 방향을 조금씩 보정하고,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또는 한국문학의 전체상이랄까 어떻게 윤곽을 잡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수행할 부서를 설치하려고 한다. 이미 한두분을 영입해 시작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잘 나갈 때 수준 높은 K팝을 계속 제공하는 것도 한류를 지속시키는 방법이지만, 병행해서 민요, 판소리, 전통음악들을 적정 비중으로 함께 지원하는 것이 K팝을 장기적으로 도와주고 서양 청중들도 제대로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강, 신경숙, 편혜영, 김연수 등 해외 독자들의 기호에 맞는 작품들을 지원하면서, 이와 함께 삼국유사, 한중록, 열하일기 같은 것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서양의 독자들을 위해주는 일이며, 장기적으로 문학 한류를 더 깊게, 더 넓게, 더 튼튼하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 전문 번역자들을 어떻게 양성하나.

▲ 번역인력 양성은 번역원이라는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우수한 번역인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단기속성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긴 시간을 두고 꾸준히 밑불을 지피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 호감, 매력을 유발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돕고, 그것으로 그 사람들이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까지도 신경 써 주지 않으면 건질 수 없다.

한국문학 번역의 첫 세대는 미국 평화봉사단 출신들이다. 1960년대 한국에 왔던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돌아가 떠듬떠듬 번역한 것이 처음이다. 번역원 부설 번역아카데미가 생긴 지 10년이 됐다. 꾸준히 10년을 밑불을 때서 이제 둘씩 셋씩 얼굴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소라 킴 러셀 같은 사람이다.

현재 105개 국가, 1천349개 대학이 한국어 과정을 운영한다. 국내 대학에도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과정이 있다. 번역원이 1년에 번역출판을 지원하는 책이 130~140종 정도이다. 책 한권 번역하는데 2년으로 잡는다 해도 140권 정도가 유지되면서 작동되려면 해외 번역자가 300명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도가 안된다. 게다가 정말 신뢰할 수 있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문학적 감동을 담보할 수 있는 번역자는 절대적으로 모자란다.

-- 번역아카데미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 매년 20명 내외의 원어민 학생들이 2년의 정규과정에 입학한다. 학비는 없고 체재비가 지급된다. 해외 주요 대학의 한국 관련 학과 교수들의 추천을 토대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다. 번역에 관심 있는 국내 거주 외국인, 내국인들을 위해 40명 정도로 특별과정도 운영한다. 과정을 다 마친 사람들을 위해 30명 정도로 심화 과정도 있다.

번역아카데미는 번역원 부설 기관일 뿐이지 학력을 인정해 줄 수 없다. 대학원대학 형식으로라도 해서 석사과정에 준하는 학위를 줄 수 있어야 학생들을 유치하기가 쉽고, 우수하고 권위 있는 교수들을 모셔올 수가 있다.

정원 200명 정도의 대학원대학의 경우 설립비로 150억원 정도, 운영비로 매년 35~40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안을 낸 것이 4~5년 전이다. 국가 전체로 봐서 절대 손해 보는 투자는 아니라고 본다.

-- 번역역량을 키우기 위한 중장기 사업계획은.

▲ 하나는 번역아카데미를 좀 더 공인되고 규모를 갖춘 교육기관으로 키우는 것, 또 하나는 해외대학의 한국 관련 학과와 긴밀한 유대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당 학과에 매 학기 한국번역 실습과정을 개설하게 하고, 학기 말에 대상 작품의 작가를 번역원이 파견하는 것이다. 올해 10여개 해외대학에 작가를 보냈는데 호응이나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그렇게 해서 재능이 있는 원어민 인재들이 한국문학 번역에 흥미를 갖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한류의 종점, 한류의 기초는 문학이다. 이를 잘 활용하고 살려야 한다.

--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로 인해 번역자에 대한 관심이 높다.

▲ 맨부커 인터내셔널에서는 번역자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원작자는 한강이지만, 거기서는 누가 번역한 것이 중요하다. 스미스의 번역은 심사위원들이 전원일치로 기립박수를 보낼 만큼, 굉장히 아름다운, 매력적인 영어문장으로 평가받았다. 작가적 역량이 상당한 사람으로 보인다.

번역하는 사람 자신이 원작에 매료돼서 자신의 작품 쓰듯이 해야 한다. 창작이나 다름없다. 그 정도로 해야 감동이 적재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한국문학이 훌륭해야 한다. 문학적 감각을 가진 외국인이 어쩌다 한국작품을 접하게 돼서 참 좋구나, 참 훌륭하구나 라고 끌릴만한, 감동할만한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안되면 아무리 번역역량을 키워본들 소용이 없다.

-- 번역원의 비전을 정리하자면.

▲ 번역원이라는 이름이 오해를 유발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는 한국문학의 국제교류 본부이다. 시공간적으로 광폭의 한국문학의 총체를 해외에 알리는, 국가로 치면 외교부에 해당한다. 소극적으로 번역출판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양한 차원과 수준의 문학 외교를 수행해야 한다.



※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은 대전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했다. 1981년 '시와 경제'에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를 쓰며'(연작)로 등단했다. 1982년 '한국문학의 현 단계'에 '지금 이곳에서의 시'로 평론가로도 등단했다. 1987년 첫시집 '밤에 쓰는 편지'를 펴냈다.

1983∼1987년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 1985~2005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 작가회의 부설 민족문학연구소 부소장, 2002~2018년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인문과학연구소장, 2011년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교환교수, 2017∼2018년 중국 중앙민족대 외래교수를 지냈다. 2015~2016년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을 진행했다.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지훈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을 받았다.

ke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