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먹고 편히 쉬다 가렴" 두루미 월동 돕는 철원 농민들
추수 후 볏짚·낱알 빈 논에 남겨…철새 겨울나기 큰 도움
(철원=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가을걷이가 끝난 철원 민통선 지역은 말 그대로 겨울 철새의 낙원이다.
겨울 진객으로 불리는 두루미(멸종위기Ⅰ급, 천연기념물 제202호), 재두루미(멸종위기Ⅱ급, 천연기념물 제203호)를 비롯해 큰고니(천연기념물 제201-2호), 독수리(멸종위기Ⅱ급, 천연기념물 제243-1호), 쇠기러기 등이 철원평야를 찾아 겨울을 난다.
철원평야는 겨울에도 땅속에서 따뜻한 물이 흐르고,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철새들이 안심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드넓게 펼쳐진 곡창지대는 추수 이후에도 먹이가 풍부해 겨울을 나기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철원은 겨울이면 폭설과 한파가 닥치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어서 철새들이 먹이 활동에 애를 먹을 때가 많다.
이에 따라 철원 농민들이 귀한 손님인 겨울 철새들의 월동을 돕기 위해 해마다 팔을 걷고 나선다.
24일 철원군 동송읍을 찾았을 때 추수를 마친 논에 재두루미 가족이 찾아와 부지런히 낱알을 쪼아대며 먹이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 마리 모두 크기는 비슷했지만 흰 이마와 머리의 붉은 점을 가진 어미 새와 달리 유조(새끼 새) 두 마리는 아직 얼굴에 회색 털을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청회색 신사복을 입은 듯 도도한 모습으로 들판을 거니는 재두루미 가족은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잠시 경계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먹이를 찾았다.
이들이 먹이를 찾는 논을 자세히 살펴보니 일반적으로 추수를 마친 논과 다른 점이 보였다.
보통 추수를 마친 논은 소 여물 등으로 쓸 볏단을 베일러 작업을 통해 벼 밑부분까지 짧게 잘라 둥그렇게 말아서 모으기 때문에 바닥에 볏짚이 많지 않은 데 비해 재두루미 가족이 자리한 논에는 잘게 자른 볏짚이 곳곳에 가득했다.
거두지 않은 낱알도 논바닥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철원지역 농민들이 두루미에게 먹이와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남겨둔 것이다.
철원군은 두루미를 포함한 겨울 철새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지역 내 주요 철새도래지에 대해 볏짚 존치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벼 수확 후 볏짚을 수거하지 않고 10∼15㎝가량 잘라 논바닥에 골고루 뿌려 두루미에게 먹이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사업에 참여한 농민은 ㎡당 50원의 사업비를 받고 두루미 보호에 앞장서게 된다.
사업에 참여한 한 농민은 "귀한 손님인 두루미에게 먹이도 제공하고 일정 금액을 보상까지 받는다"며 "또 볏짚이 다시 거름 역할도 해 지력까지 좋아지니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2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는 이 사업에는 매년 300농가 이상이 참여한다.
볏짚 존치 외에도 철원 농민들은 두루미에게 안전한 쉼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확이 끝난 논 약 30만㎡ 규모에 물을 가두는 무논 조성, 우렁이와 어류 등 먹이를 확보해뒀다가 무논에 주는 먹이 주기, 샘물 받이 조성, 가림막 설치 등의 수고를 마다치 않고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철원평야를 찾는 두루미 수는 매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1999년 겨울철 조류 동시 총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930마리가 찾았다.
최종수 철원두루미협의체 사무국장은 "자발적인 농민들의 참여로 두루미 보호가 잘 이뤄지고 있지만, 참여 범위가 더 확대돼야 한다"며 "철원에 두루미가 지속해서 오게 하는 정책, 농민들의 수고에 보답하는 정책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yangdo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