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끄지 수렁'에 빠진 사우디에 손 내민 러시아

입력 2018-10-24 05:49
'카슈끄지 수렁'에 빠진 사우디에 손 내민 러시아

사우디 과실치사 주장 옹호…서방 대거 불참한 FII에 거물급 대표단 파견

사우디 "러시아와 연말에 장기 에너지 합의 맺을 것" 화답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했던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으로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손을 내민 건 전통 우방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우발적 과실치사라는 사우디의 주장이 국제 사회의 불신과 냉소를 받는 동안 한 곳이라도 더 우군이 절실했던 사우디로선 고맙고 반가운 '친구'가 아닐 수 없을 터다.

이번 사건이 사우디 왕실이 지시한 계획적 암살이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동안 '찰떡 공조'를 과시했던 미국은 갈팡질팡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사건 초기 '가혹한 처벌'을 언급했다가 20일 사우디 검찰이 우발적 과실치사라고 발표하자 "긍정적인 큰 첫걸음"이라고 두둔하더니 23일엔 사우디 당국의 조사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미 의회 일각에서는 사우디에 대해 경제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와 '전통 우방'이라는 외교적 수사가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반면 러시아 크렘린 궁은 23일 낸 성명에서 카슈끄지 사건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거부하면서 "그 사건의 검증된 정보가 있어야 대응할 수 있다"며 "러시아는 왕실이 살해와 관련 없다는 사우디의 공식 발표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사우디의 영향력이 큰 아랍권 외에 사우디를 옹호한 곳은 사실상 러시아가 유일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 18일 "무엇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 사우디와 관계를 왜 망쳐야 하느냐"며 사우디를 두둔했다.

카슈끄지 사건에 휘말린 사우디와 어정쩡한 미국 사이에 벌어진 틈과 이를 적시에 치고 들어온 러시아의 전략적 판단은 2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JP모건, 스탠다드차타드, 포드 등 미국 대표 기업의 CEO와 뉴욕타임스, CNN 등 미국 언론이 카슈끄지 사건을 둘러싸고 커지는 사우디 왕가의 배후 의혹으로 줄줄이 불참을 선언했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도 리야드 방문을 취소하려다 FII에는 참석하지 않고 사우디 지도부를 만나는 것으로 일정을 줄였다.

지난해 처음 열린 FII에서 "매년 리야드로 돌아와 사우디의 성공을 확인하겠다"며 사우디에 찬사를 보냈던 그였다.



이들의 빈자리를 메운 건 러시아였다.

23일 개막식 직후 열려 주목도가 가장 높았던 패널토론엔 러시아 국부펀드 직접투자펀드(RDIF)의 키릴 드리트리에프 최고경영자(CEO)가 토론자로 나왔다.

지난해 이 자리엔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앉았다.

드리트리예프 CEO는 로이터 통신에 "카슈끄지 피살은 반드시 조사해 범인을 처벌해야 하지만 사우디의 경제·사회 개혁 드라이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시부르 홀딩스의 드미트리 코노프 회장, 알로사의 세르게이 이바노프 CEO, VTB 은행의 안드레이 코스친 회장, 석유재벌 미하일 구트세리에프 등 거물급 러시아 기업인이 러시아 대표단을 구성해 리야드를 찾았다.

사우디 국영 아랍뉴스도 23일 "서방의 여러 경영인이 카슈끄지 피살 사건 이후 불참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에서 대규모 투자 협력을 타진해 왔다"며 러시아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사우디도 러시아의 접근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 산업에너지광물부(옛 석유부) 장관은 23일 FII 개막식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가 연말에 에너지 분야에서 영구적일 수도 있는 장기간 유효한 (산유량 조절에 대한) 합의를 맺을 계획"이라며 "미국의 대규모 셰일오일 증산으로 촉발된 격한 경쟁에 직면한 두 나라가 협력을 증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슈끄지 살해 배후설의 핵심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23일 밤 러시아 대표단을 따로 만났다.

사우디는 비록 카슈끄지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지만 인권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는 러시아를 균형추로 삼아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인권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낸 셈이다.

아울러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 등 중동의 모든 현안에서 사우디가 적대하는 이란과 전략적 협력자 관계라는 점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국제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새삼 상기할 수 있는 흥미로운 광경이기도 하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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