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에 공들인 사우디 왕세자, 카슈끄지 사건에 물거품될 판

입력 2018-10-21 21:14
서방에 공들인 사우디 왕세자, 카슈끄지 사건에 물거품될 판

올해 3월 한달간 서방 주요국 영·미·프 초장기 순방

"사우디 왕세자, 큰 반향에 충격…서방에 배신감 느껴"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올해 3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 왕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장장 한 달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돌며 석유 왕국 사우디의 차기 왕좌에 오를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다.

이들 서방국가는 비록 33세의 젊은 왕세자이지만 국빈급 의전으로 환대했고, 정상과 독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사우디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각인하는 '해외 로드쇼'나 다름없었다.

장기간 해외 순방 전 그는 지난해 11월 부패 청산을 내세우며 차기 왕권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알사우드 가문의 왕자와 대기업 경영자, 전·현직 고위 인사 350명을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 전격 구금하고 재산 헌납과 충성맹세를 받아낸 터였다.

동시에 제2왕위계승자(부왕세자)였던 그는 친부인 살만 국왕을 등에 업고 서열이 한 단계 위였던 사촌 형을 왕세자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 뒤 왕세자로서 서방의 '빅3'를 차례로 찾아 국제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그는 방문 기간 영국 방산업체 BAE시스템스의 차세대 전투기 유로파이터 타이푼 48대(160억 달러 이상 추정) 구매 등 수천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약을 '선물'하면서 환심을 샀다.



그는 이런 '오일 달러 외교'뿐 아니라 그간 서방이 사우디를 비판하는 '단골 소재'였던 인권 문제에도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며 중동의 젊은 개혁 정치인의 이미지를 부각했다.

국내 보수 종교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여성 운전과 축구 경기장 입장을 허용했고, 40년 가까이 금지됐던 극장을 재개했으며 남녀 관객이 섞인 대중음악가의 콘서트도 여는 파격을 허락했다.

올해 3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구글, 애플 등 세계적 정보통신 기업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사우디 전통 복장 대신 양복을 입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뉴욕의 스타벅스에서 출근길 직장인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도 연출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리야드에서 세계 유력 경제인을 끌어모아 미래투자이니셔티브를 열어 "사우디는 그동안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제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변화하겠다"고 연설했다.

은둔의 석유 왕국에서 정상 국가로 탈바꿈하겠다는 역사적 선언으로 해석됐다.

이런 '공든 탑'은 이달 2일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반정부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으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사우디 정부는 사건 초기 카슈끄지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떠난 뒤 실종됐다고 했다가 2주일이 지난 20일 비로소 이를 번복하고 사망 사실을 시인했다.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주먹다짐 과정 중 사망했다고 사우디 검찰은 발표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제기한 기획 암살설, 무함마드 왕세자 배후설은 극구 부인했다.

오히려 카슈끄지 사망에 연루된 정보총국(GIP) 개혁을 위해 긴급히 구성된 장관급 위원회를 무함마드 왕세자가 맡았다.



그렇지만 사우디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의혹은 더 커지는 상황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실제 이번 사건을 지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건을 둘러싼 정황과 전언 진술은 모두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고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그를 배후로 지목한다.

이를 두고 서방의 언론은 개혁가로 포장된 그의 잔혹한 민낯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뒤 이란을 공적으로 '찰떡' 공조를 과시했던 미국에서도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회의와 비난이 커지고 있다.

올해 3월 무려 3주간 미국을 횡단했던 노력도 위기에 처한 그를 구원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인권 문제에 예민한 유럽도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무정하게 등을 돌렸다. 불과 반년 전 그를 극진히 환대했던 나라들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사우디를 지지한 쪽은 결국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집트, 오만, 쿠웨이트, 요르단 등 아랍 이슬람권 국가뿐이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건 초기 카슈끄지의 사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추측이다.

사건 현장인 사우디 총영사관이 자국 영토로 인정되는 데다 서방 주요국이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은 채 '의문의 실종'으로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직접 개입한 예멘 내전에서 인권과 인도주의적 위기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데도 서방이 그간 사우디에 정면으로 이의를 달지 않았던 점을 고려했을 공산이 크다.

예멘에 최악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데 대해 전쟁 당사자인 사우디도 이에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사우디에 거액의 무기를 수출하는 서방 주요국은 이번 카슈끄지 사건처럼 '정색'하면서 예멘 내전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 사우디 왕실 소식통을 인용해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이렇게 큰 반향이 일어난다는 데 정말 충격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달 10일 무함마드 왕세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에게 전화해 자신을 화려하게 찬양하던 미국의 관료와 기업가들이 지금은 비난하고 있다며 화를 냈다"고 전했다.

왕실 소식통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서방에 배신감을 느꼈다"며 "그가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나에게 등을 돌렸는지 잊지 않겠다. (서방이 아닌)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겠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거칠 것 없어 보였던 사우디의 차기 국왕은 이번 사건으로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국제사회의 냉정함을 맛보게 된 셈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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