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에릭 골드버그 "디즈니 철학은 가족"
(부천=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아우르는 디즈니만의 철학이 있다면 가족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디즈니는 아이와 부모는 물론 그 사이에 있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가장 전문화한 회사라고 생각해요."
'디즈니의 거장' 혹은 '애니메이션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에릭 골드버그(63)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감독이 올해 제20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참석차 방한했다.
21일 부천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활짝 웃음을 보이며 명함을 건넸다. 디즈니에서 제작한 명함 뒤편에는 '나인 올드맨' 중 하나인 밀트 칼이 그린 '정글북' 원화가 인쇄돼 있었다.
'나인 올드맨'은 월트 디즈니와 함께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킨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9명을 일컫는다.
에릭 골드버그는 '나인 올드맨'에 버금가는 현역 최고의 애니메이터로 꼽힌다. 1990년 디즈니 입사 이후 아카데미 2개 부문 수상작인 '포카혼타스'와 '판타지아 2000'을 연출했으며, '알라딘'에 등장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를 비롯해 '포카혼타스', '모아나', 주먹왕 랄프'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당신의 원화도 곧 디즈니 명함에 들어가는가"라고 물었더니 에릭 골드버그는 쑥스러운 듯이 "글쎄요. 두고 보죠"라고 답했다.
디즈니는 분명 애니메이션으로 일어선 기업이지만, 2000년대 이후 실사 영화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계열사인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져스'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다.
최근 디즈니는 과거 명작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재창조하는 '라이브액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당신 작품 중 실사로 보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에릭 골드버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한테 물어봐서는 답이 뻔하죠. 저는 실사보다 애니메이션을 훨씬 더 선호하기 때문에 실사로 보고 싶은 작품은 없어요. 약간 편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십 년 전 디즈니 명작 애니메이션은 현재도 걸작으로 손꼽히고, 오늘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아이는 물론 어른이 봐도 재미있는 작품으로 통한다.
에릭 골드버그는 연령을 아우르고 시대를 뛰어넘는 디즈니의 힘은 "인간미와 공감에 있다"고 강조했다.
"어찌 보면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들 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알라딘'의 '아그라바'처럼 관객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요. 또 인간미를 강조하죠. 인간미를 통해 관객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문이지만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있는지 물었다. 예상한 대로 "'제일 좋아하는 자식이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램프의 요정 '지니'라고 한다.
"지니는 제가 디즈니에서 맡은 첫 번째 캐릭터에요. 기존 디즈니 캐릭터와 완전히 달라서 좋았죠. 또 제가 작고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팬이에요. 그의 목소리에 맞춰 캐릭터를 만들 수 있어서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는 '지니'를 비롯해 인디언 족장의 딸 '포카혼타스', 폴리네시아 원주민 소녀 '모아나' 등 정형화한 공주나 왕자가 아닌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왔다.
"딱히 원주민에 관심이 많지는 않아요. 훌륭한 캐릭터와 스토리가 저의 주요 관심사죠. 덧붙이자면 강인한 여성상으로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들 때는 이들이 전형적인 공주가 돼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캐릭터에 독창성을 부여하고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이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죠."
디즈니의 대표 캐릭터 미키 마우스는 다음 달 18일 탄생 90주년을 맞이한다. 에릭 골드버그가 부천애니페스티벌에 온 이유도 관객 앞에서 직접 '핸드 드로잉'으로 미키 마우스를 그리며 이 캐릭터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오로지 수작업만으로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셀 애니메이션은 사실상 명맥이 끊긴 상태다. 에릭 골드버그 역시 상당 부분 컴퓨터 힘을 빌리지만 애니메이션 기본은 '핸드 드로잉'이라고 생각한다고.
"사실 컴퓨터 작업이나 수작업 모두 굉장한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쉽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죠. 하지만 컴퓨터로 작업하더라도 기본은 '핸드 드로잉'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친 에릭 골드버그는 직접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미키 마우스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허리에 팔을 올린 미키 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미키 마우스를 그렸나. 혹시 디즈니에 입사하려면 미키 마우스를 잘 그려야 하나"라고 다시 한 번 우문을 던졌다.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그렸다"며 "그걸 일일이 다 세는 건 정신건강에 안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키 마우스 그리기 같은 걸로 시험 보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디즈니가 애니메이터에게 기대하는 것은 독창성이에요. 자신만의 생각과 개성을 갖춘 애니메이터가 디즈니를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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