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거목' 김우창 "한국 민족사적 전환기…실리에 매몰말길"

입력 2018-10-21 05:00
인문학 '거목' 김우창 "한국 민족사적 전환기…실리에 매몰말길"

"실리·윤리 균형 추구해야…한국 사회, 문예부흥 직전 와있는 듯"

"남북대치 해소위해 끊임없이 타협 필요…주변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밀라노=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한국 사회는 거대한 민족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너무 전술과 전략만을 앞세우거나, 실리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정신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거두'이자 한국 사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큰 어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우창(81) 고려대 명예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며, 실리와 윤리 사이의 균형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19일 밤(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나' 정회원 임명식이 끝난 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전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포함해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학술기관인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나는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연구 분과 등을 갖춰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와 소통에 특히 강점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회는 깊이 있는 사유와 활발한 저술·강연 활동으로 한국 인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수준을 끌어올린 김우창 교수를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극동연구 분과의 정회원으로 선정했다.

1991년 여행 차 이탈리아를 찾은 이래 27년 만에 다시 밀라노에 왔다는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 모습에 거의 변함이 없다"며 "서양 문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 덕분인지 이곳은 천천히, 조금씩 변화하는 사회인 듯 싶다"고 운을 뗐다.



이와 달리, 한국의 경우 최근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외부를 향한 우리 내부의 관심이 커지고, 우리 문화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도 다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며 "한국 사회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르네상스처럼 문예부흥 직전에 와있는 게 아닌가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남북 관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급격한 정세 변화와 관련해서는 "우리 민족이 현재 민족사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며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서는 결국은 상대의 현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타협을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주변부와 지엽적인 부분에서부터 서로 부대끼고, 교류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교황청 면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사실상 수락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 유형"이라며, 교황의 말처럼 여건이 갖춰지면 북한을 갈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탈리아 일정을 마무리한 김 교수에게 다음 여정을 묻자 유럽에 나온 김에 아들인 김민형 옥스퍼드대학 교수를 만나러 영국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수학자인 김민형 교수가 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것 같다고 하자 김 교수는 "이제 저를 김민형의 아버지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샘이 난다"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김우창 교수와의 일문일답.

-- 근래 들어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 한국 역사에 있어 지금처럼 변화가 급속히 일어난 때가 없었다. 하나의 예로, 우리는 의자를 쓰지 않고 방바닥에서 생활하는 민족이었는데, 의자를 쓰기 시작한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방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서울 시내 식당들을 가더라도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아서 먹는 식당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급속한 변화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문화적,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외부 문화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 내부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학계의 경우에도, 중동이나 티베트를 전공한 학자들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성이 커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K-팝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한국 사회가 현재 문예부흥 직전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남북 관계의 진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 우리는 지금 민족사적인 전환기에 접어든 것 같다. 남북 대치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은 상대의 현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타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큰 것부터 해결하려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주변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부터 서로 교류하고 해결해나가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장기적인 평화 시대를 누리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의)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다시 전쟁이 날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영웅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무기가 발달한 것도 전쟁을 억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인간의 지혜도 늘어나, 전쟁이 나면 너무 많은 피해가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이런 전환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윤리와 실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계략에만 의지해 살아가려 하지만, 정신적 가치가 없으면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조선 시대에는 윤리만 강조해서 망했다면, 지금은 실리만 추구하다 보니 어떻게 살지에 대해 젊은 사람들도 모르고, 늙은 사람들도 잘 모른다. 외교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가령,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 또는 우리의 이득을 위해 미국과 중국을 이용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상대국과의 관계를 전술과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미덕인 인도주의적, 민주주의적 이상에 호소하고, 중국이 지닌 인본주의 특성에 호소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학회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나' 회원이 된 소감은.

▲ 학회의 학술 대회에 이번에 처음 참여하고, 지켜봤다. 비록 규모가 작은 행사이긴 했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 문명의 전통이 깊은 나라답게 여러 지역의 문명을 종합해서 바라보고, 이런 종합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앞으로 인류와 문명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고, 이 시대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도 이제 이런 기관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돌아가면 건의해 보려 한다.

ykhyun1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