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불상 원위치는 경주 이거사' 결정적 증거 나왔다
경주분관장 지낸 모로가 히사오, 1915년 책서 밝혀
불상 이전·이거사터 정비 논의 속도 빨라질 듯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4월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된 청와대 경내 '경주 방형대좌(方形臺座) 석불좌상'이 본래 경주 이거사(移車寺)터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나왔다.
이 신라 불상은 1912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이 경주 고다이라(小平) 자택에서 본 뒤 이듬해 서울 남산 총독관저로 옮겨졌는데, 원위치를 두고 이거사터와 경주 남산을 주장하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왔다.
지난 2011년 별세한 이근직 경주대 교수 부인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이 16일 연합뉴스에 제공한 일제강점기 자료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에 따르면 도지리(道只里) 이거사터 항목에 다이쇼(大正) 2년(1913) 중에 총독부로 불상을 이전했다는 항목이 있다.
임경택 전북대 일본학과 교수는 이 글을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번역했다.
신라사적고는 경주 금관총 발굴에 관여했고 1933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가 다이쇼 5년(1916)에 자비 출판한 책이다. 이거사터 관련 부분은 이근직 교수가 일본 덴리(天理)도서관 소장 서적을 복사해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주 문화재 사정에 밝았으며, 더구나 문제의 불상 반출에 직간접으로 간여한 것으로 이미 드러난 모로가 히사오가 이거사터 석불좌상 이전 시기로 적시한 때와 청와대 불상이 옮겨진 시점이 일치하고, 현재 이거사터에 모로가가 묘사한 그대로 석탑 기단부와 옥개석 일부가 남아 있다는 점으로 미뤄 책에 기술된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거사는 경주 시가지 동남쪽에 있는 절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성덕왕이 재위 35년(736)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청와대 불상이 본래 이거사에 있었음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료가 발견되면서 불상 이전과 이거사터 정비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보물 지정을 위한 이 불상 조사에 참여하고, 그 보고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한 불교미술사학자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문제의 '신라사적고'는 보고서를 쓸 때까지도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경주 지역 시민단체는 하루빨리 청와대 불상을 고향인 경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불교계는 불상의 역사적 가치가 조명되고 원위치에 대한 연구를 거쳐 신앙적 환경이 조성된 뒤에 옮겨도 늦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불상 소재지가 이거사터로 확정되면, 출토지 불명을 이유로 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울러 석탑 부재가 여기저기 흩어진 채로 사실상 방치된 이거사터를 정비해 불상을 조성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석굴암 본존볼을 닮아 '미남불'로도 불리는 청와대 불상은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8㎝, 어깨너비 54.5㎝, 무릎 너비 86㎝로 풍만한 얼굴과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눈이 특징이다.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모습과 풍부한 양감이 인상적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형 대좌 대신 사각형 연화(蓮華)대좌가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13년 서울 남산 총독관저에 갔다가 1939년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현 청와대)가 세워지면서 다시 이전됐고, 서울시 유형문화재를 거쳐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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