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앙숙' 사우디·이란, 美와 동시 갈등…"믿을 건 석유뿐"

입력 2018-10-16 07:45
수정 2018-10-16 15:40
'중동의 앙숙' 사우디·이란, 美와 동시 갈등…"믿을 건 석유뿐"

사우디·이란, 미국 압박에 '원유 공급 조절'로 방어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중동의 두 강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동시에 미국과 갈등을 빚는 보기 드문 광경에 벌어지고 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미국과 단교하고 국제사회의 대표적인 앙숙으로 대립해왔으나,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사우디와 미국이 이번처럼 두드러지게 불화를 빚은 것은 이례적이다.

맹방이라고 불리는 사우디와 미국은 이달 2일 발생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실종 사건 뒤 급속히 관계가 악화했다.

카슈끄지가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그 안에서 사우디 왕실이 보낸 암살팀에게 살해됐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미 행정부와 의회는 예상외로 강경하게 진상 규명과 징벌적 조치를 요구했다.

미 의회 일각에서는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 제재까지 공개적으로 거론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13일 "(사우디가) 카슈끄지를 암살한 것으로 드러나면 가혹한 처벌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암살 의혹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던 사우디 정부는 최소한 방관할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이 비판에 앞장서면서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공세적으로 자세를 틀었다.

이후 "사건의 결과를 넘겨짚지 않은 미국에 감사를 표한다"는 주미 사우디 대사관의 성명에 이어 15일 살만 사우디 국왕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통화, 16일 예정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사우디 긴급 방문 등으로 양국의 갈등이 봉합되는 국면이긴 하다.

그러나 사우디 국영방송에서 "이란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선을 넘은 칼럼이 게재되는 등 사우디는 미국의 공세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의 적성국 이란은 다음 달 5일 미국의 원유 수출 제재라는 굴레를 쓰게 되는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2차례나 분기 사찰보고서를 통해 이란이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준수했다고 확인했음에도 5월8일 일방적으로 핵합의를 탈퇴했다.

이에 따라 8월7일 금, 귀금속, 철, 석탄, 자동차 분야에 대한 1단계 제재를 복원한 데 이어 다음달 5일 이란의 생명줄과 같은 원유, 석유제품, 석유화학 분야를 2단계로 제재한다.

2단계 제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한국 등 주요 수입국이 원유 수입을 중단 또는 감축하면서 이란의 지난달 원유 수출량은 하루 평균 170만 배럴로, 약 100만 배럴이 줄어들어드는 제재의 위력이 발휘되고 있다.

미국의 '이란 고사 작전'으로 이란 리알화의 가치는 올해 들어 3분의 1로 폭락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이 세계 최강국 미국의 거센 압력에 대응하는 유일한 수단은 석유다.

두 나라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안에서 산유량 1, 3위의 주요 산유국이다.

사우디는 14일 낸 외무부 성명에서 "사우디의 경제력은 국제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하고 "우리를 경제적으로 제재한다면 더 크게 갚아 주겠다"고 역공했다.

이 성명을 두고 사우디가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유가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 석유장관도 15일 "사우디의 생산 여력이 없다면 국제 유가는 쉽게 세 자릿수가 될 것"이라며 "원유 시장에서 이런 충격을 흡수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역할을 인식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이 카슈끄지의 실종사건에 민감하고 냉랭하게 대응한 데엔 그가 미국 영주권자라는 형식적 이유 외에 고유가를 피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끈질긴 원유 증산 요구에 사우디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이 그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사우디가 곤경에 처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지렛대 삼아 원유 증산을 관철하려는 미 행정부의 의도가 깔렸다는 것이다.

알팔리 장관은 15일 "다음 달부터 원유를 증산하겠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할 뜻을 내비쳐 미국에 '화해'를 제안했다. 언론인 살해 의혹이라는 인권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석유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사우디는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진 않겠지만 언제든지 유가를 올릴 수 있는 '한 방'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부각했다.



이란도 사우디와 마찬가지로 초강대국 미국의 제재에 맞서는 마지막 보루는 석유다.

비잔 남다르 잔가네 이란 석유장관은 8일 "이란에 대한 제재로 국제 원유 시장에 공급량이 부족해지면 사우디도 이 공백을 메우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의 대이란 제재가 유가 상승이라는 역작용을 낳고 되려 미국의 동맹국에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이란으로선 미국의 제재가 원인이 된 유가 상승이 반가운 입장이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 이란의 비중이 유가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란 정부와 군부는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완전히 차단한다면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30%가 통과하는 걸프해역의 입구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예고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걸프 지역 산유국의 원유 수출통로로, 실제 군사적으로 봉쇄되면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 이상으로 폭등할 것이라고 업계는 우려한다.

비록 사우디와 이란이 역내 패권을 놓고 다투는 경쟁 관계지만, 양국 모두 풍부한 석유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국익을 지키는 방패로 쓰는 흥미로운 유사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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