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아도 견디는 '을'의 전설

입력 2018-10-16 06:03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아도 견디는 '을'의 전설

창비신인소설상 장류진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 15만 조회수 '화제'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웹 소설이나 장르 소설이 아닌데도 인터넷에서 15만 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제 몰이 중인 단편소설이 있다.

신인 작가 장류진(32)의 '일의 기쁨과 슬픔'. 올해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으로 지난달 중순 계간 '창작과비평' 홈페이지에 공개됐는데, SNS를 타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례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소설은 경기 판교 테크노밸리를 배경으로 한다. 한 IT 스타트업 회사에서 막내급으로 일하는 주인공 화자는 아침 회의에서 회사 대표로부터 '거북이알'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거북이알'은 이 회사가 개발 중인 위치 기반 중고거래 서비스 앱에 지나치게 많은 판매 글을 올리는 아이디였다. 주인공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거북이알'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거북이알'은 세련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성으로, 대기업 신용카드 회사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만나러 온 진짜 용건을 꺼내자 그녀는 자신이 15년차 차장급 직원이며, 회사에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게 되는 바람에 포인트로 물건들을 산 뒤 중고거래를 통해 현금화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황당한 사연은 이렇다. 인스타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데 재미를 붙인 회장님이 팔로워들 요청으로 클래식계 인기 스타의 내한공연을 기획하도록 지시했는데, 담당자인 그녀가 일을 성사시킨 뒤 회장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전에 공연 일정을 공지하는 바람에 회장의 진노를 샀다는 것이다.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은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중)

이 소설이 인터넷상에서 처음 주목받은 것은 IT 업계와 판교 테크노밸리의 일상을 생생히 그렸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점점 널리 읽히면서 이 시대 '을'(乙)의 설움을 묘파했다는 평을 받으며 직장인들의 '폭풍 공감'을 얻고 있다. 소설 제목은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의 동명 에세이에서 따온 것으로, 소설 말미에는 월급을 소비하는 기쁨에 관해서도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의 힘은 '을'의 슬픔을 절묘하게 그린 데 있다.



그 힘은 작가 자신이 실제 직장인으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2011년부터 7년간 판교에 있는 IT 회사에서 기획 업무를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는 동안 쓴 것이다. 지금은 또 다른 IT 회사에 입사해 다닌다고 한다.

저녁 시간에도 업무 중이라며 이메일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이 소설의 모티프에 관해 "월급을 쌀, 상품권, 포인트 등등으로 받았다는 직장인 괴담을 듣고 발상을 하게 되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회사는 (당연하게도) 모두 제가 만들어낸 허구의 회사다"라고 답했다.

그는 이런 호응을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상을 받기 전에도, 상을 받은 후에도 단 한 번도 지금과 같은 반응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며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소설을 봐주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2011년에 취직 후,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있었는데 그게 소설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글쓰기 강의'를 검색해봤고, 여러 가지 종류의 글쓰기 강의가 검색결과에 리스팅되었는데 그중에서 '소설 쓰기'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한창 단편소설을 많이 읽던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향초 클래스를 수강하면 향초 하나를 집에 가져올 수 있듯, 소설 하나를 완성해서 간직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 계속 소설이 쓰고 싶어져서 같은 강의를 여러 번 수강했습니다. 그 후로 또 약 2~3년 동안은 소설을 아예 쓰지 않는 삶을 살았고요. 2016년에 아무래도 소설을 다시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1, 2학기 다녔고, 2017년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오프라인 대학원 국문과로 편입해 3, 4학기를 다니고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묻자 "책장을 덮고 나면 아주 잠깐이라도, 적어도 10초라도 뭔가가 마음속에 남아서 그걸 가만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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