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주 박사 "사료 찾았을 때 흥분은 아직도 기억나요"
저작집 간행 기념식서 소회 털어놔…"독일서도 자료 찾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나이 드니까 기억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어떤 문서를 발견했는지는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하지만 사료를 찾았을 때 흥분감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저는 아카이브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터줏대감으로 수많은 한국 근현대사 자료를 찾은 방선주(85) 박사는 지난 12일 이화여대 인문관에서 열린 '방선주 저작집' 간행 기념식에서 과거를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방 박사는 1979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둥지를 튼 이래 1천500만장이 넘는 문서를 발굴해 한국 연구기관에 보낸 신화 같은 존재이자 근현대사 연구 개척자다.
그의 도움을 받아 연구 활동을 한 후학들이 결성한 저작집 간행위원회는 도서 발간을 기념해 방 박사 부부를 초대해 이날 조촐한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방 박사는 기억력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 했지만, 후배들의 질문을 받으면 재치 있게 답변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사료 발굴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갈 데가 없었다"며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아카이브에 갔는데,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아카이브에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문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40년 가까이 살았는데, 사료를 못 찾으면 사람이 아니에요. 관리청 직원들도 저를 많이 도와줬습니다."
방 박사는 "미국에서 찾은 사료는 사사롭게 가지려 하지 않았고, 모두 한국으로 보냈다"며 "초기에는 한국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제대로 보관하지 않은 사례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1980년대 후반인가, 1990년대 초반에 북한 사람 두세 명이 아카이브에 온 적이 있는 듯하다"며 "남한 사람과는 태도가 달랐고, 인사를 하지 않아 아는 척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재미 한인 독립운동과 재미 한인 이민사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도 다수 발견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지금까지 나온 위안부 관련 자료의 대부분을 발굴한 사람이 바로 방 박사다.
방 박사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한때는 굉장히 열심히 작업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찾은 자료를 활용해 연구 성과를 낸 학자로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에 대해 "사실은 커밍스 저작을 완독한 적이 없다"면서도 "단지 이 사람이 한국에는 도움이 될 만하다고 판단했다"고 평가했다.
방 박사는 사료를 찾고 꼼꼼히 정리하는 일을 40년 가까이 했지만, 일기는 쓰지 않았다.
"일기장에 특별히 쓸 내용이 없었어요(웃음). 제가 (중국에서) 공산당 치하에 살았잖아요. 훗날 가택수색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격상 거짓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하고픈 일이 있다. 방 박사는 "독일에서 한국 근현대사 자료를 발굴하고 싶다"며 "1∼2년 정도만 하면 충분히 좋은 사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기념식에 참석한 학자들은 방 박사와 함께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숙명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에 갔다가 방 박사와 인연을 맺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국내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 사람이 은혜를 갚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부럽다"며 "(방 박사의) 학문이 더 큰 열매를 맺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한국 현대사 연구가 20∼30년은 뒤처졌을 것"이라며 "선생님께 학은(學恩)을 입은 분은 대부분 성업했다"고 역설했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라며 "나중에 돌아보면 질문의 취지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방 박사에게서 조국애와 열정, 주위에 대한 관심을 느꼈다면서 "저작집에 선생님의 사상과 학문적 지향을 담았지만, 생활철학과 인간미까지는 싣지 못해 아쉽다"고 덧붙였다.
저작집을 건네받고 "굉장히 마음에 든다"고 소감을 밝힌 방 박사는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감사할 데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정을 느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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