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칼럼]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교황의 가시면류관

입력 2018-10-13 09:00
[율곡로 칼럼]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교황의 가시면류관

(서울=연합뉴스) 성기홍 논설위원 = 2014년 8월 14일 오전 10시 16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25년 만의 교황 방한이다. CNN은 이 광경을 생중계했다. 그날 또 하나의 뉴스가 나왔다. 교황을 태운 비행기가 한국 영해로 다가왔을 무렵 북한 원산 일대에서 동해 상으로 300mm 방사포 단거리 발사체 3발이 날아올랐다. 오전 9시 30분, 40분, 55분에 걸친 연발이었다. 교황이 한국에 도착한 직후에도 두 발이 추가 발사됐다. 북한 매체들은 이 로켓 발사 실험이 김정은 당시 국방위 제1위원장이 직접 참관하고 지도하는 가운데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세계 이목이 쏠리는 교황 방한 때에 맞춰 북한이 존재감을 부각하려 무력시위를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흘렀고, 그 날 로켓 발사 실험을 진두지휘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교황의 북한 초청 의사를 밝혔다. 격세지감이다. 한반도 정세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의 대비이다. 그 날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교황의 첫 일성은 "한반도 평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는 말이었다. 아시아 첫 방문지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선택한 교황의 '축성(祝聖) 기도문' 같았다. 교황은 이후에도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 계기 때마다 한반도 평화와 화해에 큰 관심과 지지를 표명했다. 17∼18일 문 대통령을 맞는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국무원장이 집전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를 연다. 교황의 뜻이 담긴 환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즉위 후 5년 남짓이지만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종교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도(使徒)가 되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실천과 진보적이고 개혁적 언행 때문이다. 트위터 팔로워가 3천만 명을 넘어섰고, 리트윗 기준으로 재임 시 오바마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 1위의 트위터리언이다. 냉전 시대 재임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쏟았고, 베네딕토 16세가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정통성을 중시하며 '보수 교황의 시대'를 이끌었다면, 첫 남미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담장을 넘어 불평등과 빈곤 등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폭넓은 정책적 의제를 포용하는 '개혁 교황의 시대'를 열었다.

교황은 국제적 역할도 마다하지 않아 '세계에서 제일 노련한 국제정치인'이라는 평도 듣고 있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콜롬비아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에 막후 역할을 했고, 난민 위기와 기후 변화 문제에도 목소리를 낸다. 성사된다면 교황 방북은 한반도 비핵화·평화 협상의 국제적 지지를 확산하는 기폭제일 뿐 아니라, 협상의 장애물이 돌출하더라도 과거 회귀를 막는 제어장치가 될 것이다. 평양에서 이뤄지는 교황의 미사는 북한의 개방·개혁에도 울림을 줄 것이다. 70∼80년대 요한 바오로 2세의 공산주의 폴란드 방문도 변혁에 큰 역할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기 때문에 북한과 협상에 비판적인 미국 내 여론을 돌리는데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교황의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교황은 사제의 역할은 "분열의 벽을 제거하고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1951년 단교한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임할 때도 이 일관된 원칙이 드러난다. 양측은 누가 중국 내 가톨릭 주교를 임명하느냐를 놓고 진통 끝에 지난달 합의에 도달했다. 중국 정부가 교황을 중국 가톨릭의 수장으로 공식 인정하는 대신, 교황청이 중국 정부가 교황청 승인 없이 임명했던 주교 7명을 승인하는 것으로 합의, 관계 정상화에 다가섰다. 비판론자들로부터 "교황청이 중국 공산당에 굴복했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교황은 "중국 내 가톨릭의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막고, 로마 가톨릭과 중국 가톨릭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교황 방북 검토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나 인권 등 북한 내 문제들이 제기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모든 게 끝이고 인권을 거론할 공간도 사라진다. 평화를 우선 정착시킨 뒤 인권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쿠바 국교 협상 과정에서 쿠바 인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제가 있으면 대화가 필요하고, 문제가 클수록 대화 필요성도 더 커진다"고 강조했다. "외교는 평화를 끌어내는 값진 일"이라는 것이 교황의 신념이다.

4년 전 방한 때 교황은 명동성당에서 뜻깊은 선물을 받았다.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이다. 가시관은 예수 고난의 상징이다. 분단된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자는 한국 가톨릭의 봉헌이었다. 교황은 훗날 교황청 기자회견에서 이 가시면류관을 각별하게 언급했다.

"그 선물은 분단의 고통, 헤어진 가족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남북한은 한 형제입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머니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분단의 고통은 매우 큽니다. 저는 분단이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가 부디 평양에서 이뤄지기를 간구한다.

sg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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