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소 인화방지망, 틈 벌어지고 건초더미 덕지덕지

입력 2018-10-12 18:48
저유소 인화방지망, 틈 벌어지고 건초더미 덕지덕지

"외부 화염 차단 못했을 가능성 커…조류 방지 기능에 집중"



(고양=연합뉴스) 권숙희 기자 = 고양 저유소의 유류탱크에 설치된 인화방지망의 허술한 관리 실태가 드러났다.

건조더미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손가락이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철망의 틈새가 벌어진 것도 있어 사실상 완전히 방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양 저유소 화재사고를 수사 중인 경기 고양경찰서는 12일 현장감식에서 확보한 유증 환기구의 사진을 공개했다.

폭발 사고가 난 휘발유 탱크의 유증 환기구는 현재 형태가 훼손됐으나, 주변 유증 환기구의 모습만으로도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의 허술한 안전관리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화재 장소와 정반대 방향 쪽 유증 환기구에서도 건초 더미가 잔뜩 붙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잔디를 깎고 나서 깎아낸 풀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생긴 건초 더미가 화재 사고에서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또 다른 유증 환기구에서는 철망으로 된 인화방지망이 환기구에서 분리돼 담뱃값 크기의 틈이 벌어진 모습이 확인됐다.

저유탱크 1기마다 유증 환기구가 9∼10개씩 설치돼 있는데, 사실상 언제라도 화염에 노출되면 대형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큰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경인지사 측은 인화방지망을 애초에 외부의 불씨 등을 막기 위한 용도 보다는 '버드 스크린(bird screen)'의 기능 수준에서 관리해온 것으로 보인다.

버드 스크린이란 쉽게 말해 새들이 날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얇은 금속의 망이다.

경찰 관계자는 "인화방지망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화재 예방 기능을 갖추지 않았다"며 "그마저도 고깃집 석쇠불판이 더 깨끗하고 단단해 보일 정도로 허술한 장치"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서 "유증환기구 바깥에서 유증기가 감지된 것 자체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불씨가 탱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실상 막지 못한다는 게 더 큰 위험 요소"라고 설명했다.



이중, 삼중의 방재 장치를 갖춰도 모자랄 만한 '휘발유 탱크'가 이렇게 허술하게 설계된 것은 대한송유관공사가 설립됐을 때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인지사 저유소가 준공된 1992년 당시만 해도 저유탱크가 묻힌 곳의 지형적 위치는 마치 숨겨진 요새처럼 고립돼 있어 외부와의 접촉이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돼 아파트단지와 초등학교 등이 들어섰고, 급기야 최근에는 저유탱크에서 불과 300m 떨어진 뒤쪽 야산에서 하루에도 수차례씩 발파작업을 하는 터널 공사가 진행됐다.

이번 화재도 터널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20대 스리랑카인 노동자가 날린 풍등이 불씨가 돼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몇 년 사이에 드론(전파로 조정하는 무인 비행장치) 등 첨단기술이 발달해 외부에서 고의로 위험물질 등을 투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커졌는데도, 겨우 새를 막아주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따로 없어,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003년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인화방지망을 설치한 경우 화염방지기 설치 의무가 없다.

화염방지기란 두꺼운 금속망으로, 외부에서 화염이 유입되더라도 열기가 금속에 흡수돼 유증기에 불이 붙지 않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suki@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