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했던 고대사 표상으로 인식된 안시성
안시성주 양만춘은 조선 문헌에 처음 등장
랴오닝성 '영성자산성'으로 위치 추정하나 확실치 않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추석 연휴 극장대전에서 주도권을 잡은 뒤 관객 500만 명을 향해 순항 중인 영화 '안시성'은 645년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안시성 전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연개소문이 주도한 쿠데타에 동참하지 않은 양만춘이 용맹하고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해 군사 5천 명으로 20만 대군을 무찌르는 모습을 그린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전투 장면이 백미로 꼽힌다.
하지만 제작사가 설명했듯 안시성 전투는 자세한 전황을 기록한 사료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해 함락했고 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 군대와 싸워 패했으나, 당군은 안시성 전투에서 패해 돌아갔다.
삼국사기는 "당 태종은 총명하고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라며 "그러나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에서 패했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는다"고 논했다.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학계에서는 안시성에 대한 논문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전쟁 과정을 복원한 논문과 조선시대 중국에 간 사신들이 남긴 글에서 안시성에 대한 인식을 고찰한 논문이 몇 편 있다.
이승수 한양대 교수는 200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정신문화연구'에 실은 논문 '연행로상의 공간 탐색, 봉황산성'에서 "근대에 들어 안시성은 강성했던 고대사의 한 표상으로 성립돼 위기의 순간마다 호출됐다"며 "하지만 우리의 안시성 인식은 다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이어서 논리적 기반이 허약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안시성 전투를 다룬 시(詩)는 고려시대 후기에 등장한다. 목은 이색(1328∼1396)은 '정관음유림관작'(貞觀吟楡林關作)이라는 시에서 당 태종에 대해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는 듯 일렀건만, 화살에 눈 맞을 줄 어이해 알았으리"라고 노래했다.
이 교수는 "목은이 베이징 일대에서 유포된 전승이나 기록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를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원나라 때 베이징에서 상연된 잡극(雜劇) 중에는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크게 유행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17세기가 되면 사신이 육로로 중국에 갈 때 지나치는 랴오닝성 펑청(鳳城) 봉황산성(鳳凰山城)을 안시성으로 추정하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상황을 풍부하게 기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가 전래한 점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며 "이 책은 1553년 명나라 사람 능종곡(熊鍾谷)이 지은 소설로,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梁萬春)이라고 기록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병자호란 이후 정신적 상처가 컸던 조선 지식인들은 이를 치유할 만한 역사 인물에 쉽게 이끌렸다"며 "이러한 마음이 봉황산성 일대에 전하는 전설과 만나 폭발적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덧붙였다.
즉 조선 사대부가 오랑캐로 인식한 청이 중국을 다스리는 상황에서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 양만춘이 영웅으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여러 문헌 증거를 토대로 안시성을 봉황산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특히 안정복은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철수해 사흘 만에 랴오양(遼陽)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거리가 먼 봉황산은 안시성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고, 1461년 명나라가 편찬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가이저우(蓋州) 동북쪽 70리 지점에 안시성이 있다고 언급한 점을 근거로 펑청 서쪽 하이청(海城)이 안시성 위치라고 봤다.
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안시성 위치는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하이청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여기는 시각이 우세하다.
고구려 산성 연구자인 고 정원철 박사가 쓴 책 '고구려 산성 연구'에 따르면 영성자산성은 고구려가 축조한 천리장성 일부로, 둘레는 약 2.5㎞다. 축조 시기는 5세기 이후로 추정되며, 흙으로 만든 토축(土築) 산성이다.
영화 '안시성' 제작진은 영성자산성을 답사한 뒤 이 성이 낮은 둔덕과 같은 토성이어서 고구려가 도읍으로 삼았다는 환도산성(丸都山城)과 험준한 산에 조성한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안시성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천리장성 일대에 있는 6세기 전후 고구려 성은 대부분 토축성이다. 정 박사는 "천리장성 후방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토축성이 배치됐다"며 "이러한 토축 산성은 포축형(包谷形·계곡과 능선을 따라 축조한 방식)으로 평지에서 접근이 용이하고, 규모는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구려의 전통적 석축(石築·돌로 쌓음) 산성과 비교하면 매우 이질적 방식으로, 고구려 후기에 서북방에서 실질적 1차 방어선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며 "산성 내부에서 대부분 기와가 확인된 점으로 미뤄 군사적 기능과 함께 지방통치 기능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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