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꽉 채운 소녀 '마틸다'…어른들을 위한 세련된 동화
동화적 판타지에 세태 풍자 섞어…남녀노소 두루 즐길 만
웨스트엔드·브로드웨이 거쳐 한국서 비영어권 최초 공연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공연장에 들어서면 책과 알파벳으로 뒤덮인 무대가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아역 배우들이 탄 대형 그네는 객석과 무대를 사이를 날아다니고 주인공은 초능력을 사용해 위기를 헤쳐 나간다. 동화적 판타지로 가득하지만 세련미와 스펙터클을 놓치지 않는다. 무대가 끝나면 어린이보다 성인 관객들에게서 더 뜨끈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달 개막한 뮤지컬 '마틸다'는 책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천재 소녀가 물질주의에 찌든 부모와 학교 교장의 부당함에 유쾌하게 맞서는 과정을 그린다.
2010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이후 현재까지도 성황리에 공연 중인 최신작으로, 이번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아시아 및 비영어권 최초 공연으로 관심을 끌었다.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동화작가 로알드 달(1916∼1990)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인 만큼 기발한 상상력과 따뜻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죄와 벌', '파우스트' 등을 즐겨 읽고 세자릿수 곱하기 정도는 암산으로 척척 해내는 130㎝가량의 5살짜리 소녀 마틸다가 이 작품의 주인공. 마틸다는 자신을 "독서충", "더럽고 역겨운 버러지"라 부르는 무식하고 무능한 부모와 "애들은 구더기"란 신념을 가진 교장 '트런치불'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러나 이 작은 소녀는 "한숨 쉬며 견디는 건 답이 아니"라며 "나의 이야기는 내 손으로 바꿔야 한다"고 당차게 외친다.
마틸다는 눈빛만으로 물건들을 움직이는 초능력과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재능을 활용해 부당한 부모 및 학교 시스템을 바꿔 나간다.
언뜻 보기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같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불합리한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 획일적인 교육 체제에 대한 경고, 수동태로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날리는 촌철살인의 풍자가 넘실댄다.
이 때문에 이 뮤지컬은 어린이 관객에게는 신나는 판타지를, 어른 관객에게는 잊고 살았던 용기와 정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선사한다.
영국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에서 베스트 뮤지컬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뒤 '토니상' 4개 부문 수상, '드라마데스크상' 5개 부문 수상 등 이력도 화려하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이 작품이 소개되는 것은 처음인 만큼 원작의 '말맛'을 살리기 위해 제작진이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예를 들어 대표 넘버(곡) 중 하나인 '스쿨송'은 원래 알파벳 에이(A)부터 제트(Z)까지를 재치있게 엮은 곡인데, 알파벳 소리와 일치하는 우리 말을 찾아 원곡과 같은 재미를 살렸다. '에이(A)구, 근데 지금부터 삐(B)지고 울지는 마라, 반항할 시(C), 죽이는 블랙 코미디(D)'와 같은 가사들이 이어진다.
티켓 파워가 보장된 스타 배우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뮤지컬 분야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아역 배우들이 중심에 서는 캐스팅도 신선하다. 15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황예영, 안소명, 이지나, 설가은 양이 마틸다로 선정됐다
성인 배우 못지않은 일사불란한 군무와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아역 배우들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
대사 전달을 위해 또박또박 말하려 애를 쓰지만, 앙상블을 이뤄 노래하는 장면들에서는 가사가 잘 안 들리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다.
sj99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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