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관 5명 동시 퇴임…후임 늑장인선에 '4인체제' 비상(종합)
새 헌재소장·신임 재판관 임명 지연…국회 내일 오후에야 본회의 표결
이진성 "공직자 권력 탐하면 오만과 과욕"…퇴임 재판관들도 아쉬움 토로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등 헌법재판관 5명이 6년 임기를 마치고 헌재를 떠났다. 하지만 국회의 늑장 인선으로 새 헌법재판관 인선절차가 늦어져 헌재는 헌법재판관 9명 중 5자리가 비는 사상초유의 '4인체제' 사태를 맞게 됐다.
헌재는 19일 오전 10시30분 헌재청사 1층 대강당에서 이진성 헌재소장과 김이수·김창종·안창호·강일원 헌법재판관의 퇴임식을 가졌다.
5명의 헌법재판관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지만 신임 헌법재판관 인선이 늦어지면서 헌재는 당분간 조용호·서기석·이선애·유남석 등 4명의 헌법재판관 체제로 유지된다.
당장 공석이 된 헌재소장직은 헌법재판관 임명일과 나이가 최선임인 서기석 헌법재판관이 대행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헌재소장 대행체제가 이뤄지더라도 헌법재판관 5명이 참여해야 하는 '재판관 회의'조차 열 수 없어 헌재는 당분간 '기능 마비' 상황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헌재 관계자는 "재판관 회의를 통해 주요 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에 4인체제로는 헌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새 헌법재판관 임명이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보여 공백 사태가 장기화하지는 않겠지만 헌법기관이 일시적으로나마 기능이 마비된다는 점에서 국가 재난에 비견되는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국회는 20일 오후 2시 본회의를 열어 유남석 헌재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과 김기영·이영진·이종석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을 표결한다. 4명 모두 무리 없이 국회 표결을 통과할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석태·이은애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담당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을 미루고 있어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20일까지 보고서를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송부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한 상태지만 두 후보자에 대한 재판관 자질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편 이날 퇴임식에서 이 헌재소장은 공직자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권력과 권한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권을 가진 기관이지만 그것은 권력이나 권한일 수 없다. 재판다운 재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일 뿐"이라며 "권력으로 생각하는 순간 삼가지 못하고 오만과 과욕을 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법원행정처 소속 고위법관들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친정'인 사법부를 겨냥한 충고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 헌재소장은 또 김종삼 시인의 '물 통'의 시구절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를 인용했다.
그는 "판사로서, 재판관으로서, 그리고 재판소장으로서 미력이나마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정의롭게 되도록 애썼지만 시인만큼 물 몇 통이라도 길어다 드린 것인지 반성한다"고 말했다.
다른 4명의 헌법재판관도 임기를 마치는 아쉬움을 퇴임사로 대신 전했다.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한국 사회에서 입지가 미약했던 진보정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고, 대통령 탄핵 사건의 변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팽팽한 긴장의 시간도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북한 땅에서도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자유롭게 신앙하며, 결핍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곳이 되는 꿈이 있다"고 말했다.
김창종 헌법재판관은 "6년 동안 주심으로 처리한 사건이 1천671건이고 이 중 380건을 전원재판부에서 종결 처리했다"며 "사건 수가 이처럼 많은 것을 보면 국민이 헌법재판을 통한 기본권 보장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일원 헌법재판관도 "우리 국민이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보다 적은 기본권을 누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사회적 기본권은 다르겠지만 자유와 평등, 정의를 추구하는 데는 공동체의 의지만 있으면 세계 최고수준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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