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멀쩡한 사과 한 개도 없어…"선물상자 포장 포기했어요"

입력 2018-09-19 09:05
수정 2018-09-19 09:19
[르포] 멀쩡한 사과 한 개도 없어…"선물상자 포장 포기했어요"

예산 농민들 "냉해에 폭염·폭우 반복 천재지변 아닌 일상…근본적인 대책 필요"

(예산=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어차피 다 흠과입니다."

사과 주산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윤혜숙(65·여) 씨는 19일 군데군데 썩고 갈라져 못쓰게 된 사과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년 이맘때면 일꾼을 동원해 사과를 포장하고 화물차에 싣느라 분주했지만, 올해는 추석이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는데도 하릴없이 한가하기만 하다.

그나마 멀쩡한 것을 골라 택배로 보내려고 혼자 흠과 선별 작업에 나섰지만, 상한 사과를 쳐다보면 심란하기만 하다.

윤씨는 "대부분 흠이 있다 보니 골라내기도 쉽지 않아 올해는 추석 선물용 상자를 포장하는 작업도 안 하고 그냥 궤짝째로 팔고 있다"며 "올해 사과값이 많이 올랐다지만 우리는 대부분 도매상에 넘겨 제값을 못 받는다"고 전했다.

지난 봄 갑작스러운 이상저온 현상으로 예산지역 과수농가가 냉해 피해를 본 데 이어 폭염에 가뭄까지 이어지면서 윤씨 농가의 사과 출하량도 지난해의 6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2만3천㎡의 사과밭에서 나온 출하량이 지난해의 경우 3천 궤짝(한 궤짝 당 18㎏) 정도였지만, 올해는 500 궤짝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봄을 간신히 넘겨 열매를 맺은 사과도 2차·3차 낙과 피해가 이어지더니, 여름에는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까지 겹치면서 여기저기 데이고 누렇게 변해 갔다.

태풍이 충청권을 비껴간 덕분에 낙과 피해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뿐, 수확기에 쏟아진 폭우로 그나마 멀쩡하던 것도 가운데가 벌어지고 쩍쩍 갈라졌다.

윤씨는 "비는 오랄 때는 안 오고 뒤늦게 퍼붓더니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얼먹어 버렸다"며 "멀쩡한 줄 알고 공판장에 보냈다가 헐값에 넘기는 일이 빈번했다"고 속상해했다.



윤씨 농가 인근에서 2만여㎡ 규모의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정재현(64)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수백 궤짝씩 쌓아놓고 팔았던 선물세트용 사과의 올해 출하량은 5㎏짜리 20∼30상자에 그쳤다.

정씨는 "흠이 없는 상품성 있는 사과 물량은 작년의 10분의 1도 안 된다"며 "인근의 아는 주민에게만 팔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과만 작업하고 있다"고 전했다.올해 이상 기후로 전국적으로 흉작이 이어지면서 상품성이 좋은 사과는 5㎏당 4만∼4만5천원까지 올랐지만, 조금만이라도 상처가 있는 사과는 10㎏당 5천∼1만원으로 가치가 급격히 하락했다.

추석 한 달 전부터 차 댈 곳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던 정씨 농장 앞은 이날 한적하기만 했다.

그는 "지난해에는 수확기에 4∼5명 정도 고용하고 가족·친지까지 동원해 작업을 했지만 올해는 수확부터 포장까지 아내와 둘이서만 작업을 했다"며 "어차피 상자값도 안 나오는데 골라내 봐야 의미가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농작물 재해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농가에서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지만, 냉해의 경우 특약사항이어서 가입하지 않으면 보상을 받을 길이 없다.

예산지역에서 올해 봄 이상저온으로 냉해로 915농가가 957ha에서 낙과 피해를 봤지만, 농작물 재해보험 특약에 가입한 농가는 91농가(98ha)로 전체 피해 농가의 10.2%에 불과한 실정이다.

정씨는 "그동안 봄에 서리가 내린 적이 없었는데, 특약에 가입한 농가가 얼마나 있겠느냐"며 "정부에 서리, 태풍 다 제각각 적용하지 말고 보험료를 인상해도 좋으니 한꺼번에 보상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해가 매년 반복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천재지변이 아닌 일상"이라며 "선진국처럼 자연재해에 대비해 우박 피해 방지시설, 안개 분사시설 등을 설치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j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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