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경기 여주 영녕릉

입력 2018-10-12 08:01
[연합이매진] 경기 여주 영녕릉

'성군' 세종·'북벌군주' 효종이 잠든 곳

(여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조선 왕조 27대를 이루는 왕과 왕비의 능은 42기에 달한다. 이 중 남한에 있는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기도 여주에는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英陵)이 있다. 소헌왕후 심 씨와의 합장릉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근처에는 '북벌 군주'로 알려진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영릉(寧陵)이 자리하는데, 두 기(基)를 합쳐 영녕릉이라 부른다.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침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조선 4대 임금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 승하한 1450년 2월 17일 세종실록은 세종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록했다. 실록은 또 재위 기간에 대해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고 했다.

한글 창제의 주인공이자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은 세상을 떠난 해 6월 10일 경기도 광주(廣州) 대모산 발치의 헌릉 서쪽에 묻혔다. 헌릉은 세종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힌 곳이다. 세종은 1438년 자신이 묻힐 수릉(壽陵) 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다.

이곳에 먼저 묻힌 것은 소헌왕후였다. 1446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신하들이 수릉 자리가 좋지 않다고 만류했지만 세종은 부모 곁만 한 길지(吉地)가 없다며 듣지 않았다. 실제 왕후의 무덤을 조성할 곳을 파보니 물길이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이 승하해 소헌왕후와 합장되면서 이곳에는 조선왕실 최초의 합장릉(合葬陵)이 들어섰다. 이 합장릉은 현궁(玄宮·봉분) 안에 석실이 2개인 형태였다. 왼쪽 석실에는 소헌왕후를, 오른쪽에는 세종을 모셨다.



◇ 조선왕실 최초의 이장(移葬)

세종대왕릉은 어떻게 여주로 옮겨졌을까. 세종 사후 왕실에 흉사가 이어진 탓이 크다. 세종의 장자인 문종은 39세에 죽었고,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이후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사됐으며,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는 요절했다. 세조가 영릉 천장(遷葬·무덤을 옮김)을 명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예종 때인 1469년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조선왕실 최초의 이장이 진행됐다.

영릉 천장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이 죽자 지관이 자리를 잡아주며 봉분과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후손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영릉 천장을 위한 자리를 찾던 중 지관이 여주 능서면에서 자손이 창성하고 만세에 승업을 이룰 명당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이인손이 묻힌 땅이었다. 왕의 뜻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인손의 묘를 옮기려고 땅을 파헤치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 이장하라'고 적힌 글귀가 나왔다. 연은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는데 이인손의 집안은 그 자리에서 자손이 번창했다고 한다. 현재 이인손의 묘는 능서면 신지리에 있다.

이렇듯 영릉 터는 천하명당으로 손꼽힌다. 영릉 천장으로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이곳은 용이 똬리를 튼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봉황이 알을 품은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의 명당이다.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조성해야 한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준을 어기면서까지 200리나 떨어진 여주에 무덤을 쓴 이유가 여기 있는 듯하다.



◇ 두 영릉 이어주는 '왕의 숲길'

조선 왕릉은 재실·연지·금천교·홍살문이 있는 진입 공간, 참배를 위한 제향 공간, 봉분이 있는 능침 공간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세종대왕릉은 현재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진입 공간과 제향 공간을 둘러볼 수 없다. 공사는 2020년 초에나 끝날 예정이다. 다행히 세종이 잠들어 있는 능침 공간과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둘러볼 수 있다.

능침에 가기 전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좋다. 세종과 효종의 생애와 업적이 잘 정리돼 있다. 곤룡포 차림에 익선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의 어진을 비롯해 왕자 시절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의 '왕자시절 독서도', 북극성을 관찰하는 모습을 그린 '서운관도'와 '집현전 학사도' 등을 볼 수 있다. 세종대왕·소헌왕후 어보, 월인석보, 농가집성,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등의 복제품과 다양한 악기도 진열돼 있다. 조선 왕실 무덤 조성 모습도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세종대왕 즉위 600년을 기념해 면류관과 구장복 등을 전시하는 '조선국왕의 즉위식' 전시회를 오는 11월 4일까지 연다.

능침 공간은 현재 효종대왕릉과 연결되는 '왕의 숲길'을 통해 갈 수 있다. 길이 약 700m의 이 길은 숙종, 영조, 정조가 행차해 효종대왕릉을 참배한 후 세종대왕릉을 찾았던 통로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싱그러운 숲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세종의 능침 공간에 도착한다.

무덤은 주산(主山)인 칭성산의 중허리에 자리한다. 무덤을 등지고 서면 산줄기가 좌우로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멀리 남쪽으로 북성산이 바라다보인다. 산세가 마치 신하들이 왕릉을 향해 엎드려 있는 듯하다. 언덕 아래로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내려다보인다. 편안하면서도 가슴이 트이는 풍경이다.

천장할 때 세종대왕릉은 내부 묘실이 석실에서 회격실로 바뀌었다. 조선 왕릉 묘실은 초기에 석실이었다가 세조의 광릉(光陵)부터 관을 구덩이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실 양식으로 변모했다.

조선 왕릉의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 장대석을 설치해 상계(上階)·중계(中階)·하계(下階)로 구분한다. 상계는 죽은 자의 침전 기능을 하는 봉분, 중계는 문인(文人), 하계는 무인(武人)의 공간이다. 영릉의 상계를 보면 봉분 둘레로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세조의 유명에 따라 난간석만 설치했다. 난간석 동자석주에는 십이지신상 대신에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봉분 앞에는 합장릉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혼유석(魂遊石·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을 2개 놓았다.

나머지는 조선 전기 왕릉의 배치 원칙을 따르고 있다. 봉분 둘레로 ㄷ 자 형 곡담(曲墻)을 두르고 그 안쪽으로 사악한 귀신을 쫓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4쌍씩이 곡담을 바라보도록 놓았다. 혼유석 좌·우측으로는 신성한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중계에는 혼유석 앞 중앙에 어둠을 밝히는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고, 장명등 좌·우측에는 문석인(文石人)과 석마(石馬)가 마주 보고 있다.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있다. 문·무석인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시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실행에 옮기지 못한 효종의 북벌계획

조선 17대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병자호란(1636년)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에서 8년간 머물렀던 인물이다. 청나라 볼모 생활이 끝나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1645년 갑자기 죽자 세자에 책봉됐고 인조가 승하한 1649년 즉위했다. 청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효종은 즉위 후 송시열, 김집, 송준길 등 청나라에 강경한 신하들을 중용했다.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며 북벌계획을 수립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기도 했다. 또 네덜란드인 하멜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도록 했다.

효종은 1659년 5월 4일 41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 의료사고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따르면 치료에 관여했던 의관들은 국문을 당하고 유배됐다. 효종의 재궁(梓宮·관)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재궁은 보통 왕이 살아 있을 때 마련하는데 효종의 시신이 부어 재궁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나무판을 덧붙여 재궁을 늘리고 옻칠을 32회 했다. 보통 옻칠은 재위 기간에 맞추기 때문에 10회만 하면 되는데 아들 현종은 효성을 이유로 32회 했다고 한다.

승하한 효종은 처음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의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무덤) 서쪽 언덕에 묻혔다. 하지만 능침에 틈이 생기고 빗물이 스며 몇 차례 수리했지만 소용이 없자 현종은 1673년 10월 여주로 무덤을 옮겼다. 능 터에 있던 민가 25채와 묘소 60여 기를 옮긴 후 조성했다고 한다.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는 효종릉 천장 이듬해 2월 질병으로 승하해 6월 여주에 안치됐다. 인선왕후의 유지(遺志)를 따라 배를 이용해 상여를 운반했는데 150여 척의 배로 3일 만에 여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 세종대왕릉 천장이 낳은 여주 地名

효종대왕릉으로 향하는 길에 우선 재실을 거치게 된다. 재실은 평소 능원관리인이, 제사 때는 제관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 재실은 소실된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맡아보는 관아)을 제외하면 모두 온전히 보전돼 있어 조선 왕릉 재실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돼 있다. 재실은 민도리집(기둥이 직접 보를 받치도록 한 구조의 집)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담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고 다시 협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재실이 나타난다. 담벼락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이 서 있다. 보통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지만 이곳 회양목은 보기 드물게 크다. 재실과 제기고 사이의 담 옆으로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끼가 가득한 줄기와 잔뜩 구부린 모양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구불구불 곡선미를 뽐내는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길을 따라가면 홍살문과 정자각 뒤로 영릉이 내다보인다. 특이한 점은 보통 왕릉에서는 금천교(禁川橋)를 건넌 후 홍살문이 나타나지만 이곳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을 지나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를 건너면 왼쪽에 제향 음식을 차리는 수라간, 오른쪽에 능지기가 사용하는 수복방이 자리한다. 정면에는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평면의 모습이 한자 '丁' 자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각 오른쪽 뒤편에는 효종의 업적을 기록해 세운 비가 보관된 비각이 있다. 그리고 정자각 뒤 언덕에 영릉이 자리한다.

왕과 왕비의 능이 한 곳에 있을 때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릉은 아래쪽 언덕에 인선왕후의 능을, 위쪽 언덕에 효종의 능을 마련했다. 풍수지리적으로 언덕 상하에 혈(穴)이 존재해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혈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한다. 조선 왕릉 중 이런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양식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의릉(懿陵,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무덤)과 함께 2개뿐이다. 효종의 봉분 둘레로는 삼면에 곡담을 둘렀지만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담이 없다. 이는 정자각과 곡담 사이의 공간을 부부인 왕과 왕비가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한자로 새겼다. 세조의 광릉 이후 사라졌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은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때부터 없어졌다.

'여주'(驪州)라는 지명은 세종대왕릉 천장으로 얻은 이름이다. 영릉이 여주로 옮겨가면서 당시 여흥도호부가 여흥목으로 승격됐고, 다시 여흥목이 여주목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인 신륵사, 세종대왕의 누이인 경안공주의 묘가 있다.

여주시는 올해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신륵사 관광지 일원에서 '세종대왕문화제'를 개최한다. '한글 디자인 전시', 세종대왕과 한글을 주제로 한 이야기마당, '세종골든벨' 등 전시와 체험 행사, 문화 공연이 펼쳐진다.

여주박물관은 12월 30일까지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 세종대왕 즉위과정, 업적을 살펴보는 '세종, 왕이 되신 날' 특별기획전을 연다. '삼강행실도 언해',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세계',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월인석보' 등 유물과 작품 50여 점을 볼 수 있다. 세종 금보 찍기, 자격루 원리 이해하기 등 체험행사도 진행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은 10월 5일부터 12월 2일까지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다룬 순수 창작 뮤지컬 '1446'을 무대에 올린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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