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흥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신간 '제국의 품격'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자국의 이해관계가 위험해지면 정치인들은 곧바로 힘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힘을 사용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다른 강대국들이 경쟁조차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경쟁국들은 그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호를 보내면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해군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함 31척은 지중해, 27척은 아프리카, 14척은 남아메리카 그리고 112척은 태평양 해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 얘기일까.
대부분 미국을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100년 전 막을 내린 대영제국 얘기다. 1848년 영국은 동인도 제도와 중국 연안까지 25척의 전함을 둘 만큼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간 '제국의 품격'(21세기북스 펴냄)은 북해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제국을 건설한 배경을 분석한다.
저자는 영국사 권위자인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로 정년퇴임을 앞두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펴냈다.
영국은 하나의 땅덩어리 안에서 팽창하는 모습을 보인 기존 제국들과는 다른, 지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근대적 제국을 최초로 탄생시켰다.
영제국은 한때 전 세계 지표면 4분의 1, 전 세계 인구 4분의 1을 차지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나라는 53개국에 이른다.
영국이 전 세계 패권을 유지한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이후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00년 동안을 흔히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ica)'라 칭한다. 이 시기는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됐는데 경쟁 상대가 없던 영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 됐다.
영국 해군은 원래 스페인제국 상선을 약탈하던 사략선에서 출발했다. 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도약했으며, 1805년 프랑스와 벌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제해권을 거머쥐게 됐다. 1900년까지 영국은 나머지 나라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선박 톤수를 보유했다.
책은 영국이 원래부터 정치적 패권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적 번영이 우선적인 목표였으며 해군력은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
일찌감치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영국의 자유방임적 전통이 제국의 경영에도 투영됐다고 본다. 영국이 영토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시기를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이 본격화된 19세기 말로 잡는다.
영국은 기차, 증기선 등 앞선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에 의한 산업화를 바탕으로 인도 등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전 세계 무역을 장악했다. 이를 통한 경제적 번영은 제국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영국은 100년 동안 세계경찰을 자처했다. 전 세계 해상에서 해적을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했다. 과거 경제발전의 발판으로 삼은 노예무역을 선도적으로 폐지한 뒤에는 노예무역 단속에 앞장섰다.
영국은 노예무역을 공격해 얻은 도덕적 위신을 다른 정치적 목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영국인들은 자유와 자유무역, 우월한 문명의 전파를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이를 제국주의와 식민체제의 명분으로 삼았다.
책은 영제국이 제국 내부의 자체 모순과 더불어 지속적인 기술 혁신과 구조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쇠퇴했다고 분석한다.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 들어간 방위비는 제국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을 훨씬 앞질렀다. 게다가 18~19세기 세계 시장을 석권한 영국 제품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등장한 잠수함과 전투기 등 신무기는 전통적인 해군력이 가진 중요성과 영국의 군사적 위상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저자는 영국 제국주의의 양면성을 지적하면서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 덜 해악적이었고 문명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더 컸다고 평가한다.
"영국 역시 결국에는 공격적이고 탐욕스런 제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제국을 문명의 확장으로 파악하고, 제국은 좀 더 유능한 사람들이 관대하게 통치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권리면서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는 영국인들의 시각은 그들의 제국을 가장 '덜' 사악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인도 등지에서 종속민들의 자존감을 손상했으나 근대적 경제체제와 정치적 통합, 민주주의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저자의 평가는 식민지배 옹호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런 논리는 일본이 없었다면 한국은 근대화되지 못했을 것이란 '식민지 근대화론'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
책의 장점은 영제국의 모습과 작동 원리를 생동감 있게 되살려내는 데 있다.
읽다 보면 과거 영제국이 오늘날 미국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진로를 상상하는 데 영감을 준다.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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