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암살' 러 용의자들, 영국 입국서 출국까지 사흘간 행적

입력 2018-09-06 18:46
'스파이 암살' 러 용의자들, 영국 입국서 출국까지 사흘간 행적

가디언, 경찰 설명 토대로 러시아 용의자들 행적 재구성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봄 기운이 전해질만 했지만 지난 3월 초 유럽은 한창 이상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국 검찰이 '러시아 이중스파이' 암살시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 러시아 정보당국 소속 장교 알렉산드르 페트로프와 루슬란 보쉬로프가 지난 3월 2일 모스크바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모스크바의 기온은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고 런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러시아 아에로플로트 항공 소속 비행기를 탄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털모자와 함께 '니나 리치' 향수병을 들고 영국에 입국했다. 향수병이 든 상자에는 '메이드 인 프랑스'(Made in France)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6일(현지시간) 일간 가디언이 런던 경찰청 설명을 재구성한 데 따르면 향수병에는 러시아가 군사용으로 개발한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이 들어있었다.

향수병은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특별히 주문 제작됐는데,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운영하던 악명 높은 독극물 제조소에서 냉전 기간 내내 이와 비슷한 장치를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경찰은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라는 가명을 쓴 이들 러시아인이 러시아군 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소속 직업장교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GRU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서 분리됐는데 때로는 경쟁을 펼치기도 하는 관계로 알려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GRU가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 이메일 해킹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러시아 출신 이중스파이였던 세르게이 스크리팔(66) 암살 임무를 받고 영국에 입국했다.

스크리팔은 GRU 소속 전직 장교로 2006년 러시아 정보기관 인물들의 신원을 영국 해외담당 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에 넘긴 혐의로 기소돼 13년형을 선고받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010년 미국과 러시아의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 때 스크리팔 등이 풀려나자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배신자들은 죽게 될 것이다. 믿어도 좋다. 이들은 친구들을 배신했고, 전우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가 탄 아에로플로트 항공 SU2588 비행기는 금요일이었던 3월 2일 오후 2시 런던 개트윅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이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 심사를 받는 모습이 CCTV에 찍혔는데, 보쉬로프는 짙은색 머리색깔에 염소수염을 하고 있었고, 페트로프는 수염을 깎지 않은 채 푸른색 깅엄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들은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런던 빅토리아역으로 향했고, 여기서 지하철로 갈아탄 뒤 바우 지역에 있는 숙소인 '시티 스테이 호텔'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시대풍의 붉은 벽돌에 치장된 '시티 스테이 호텔'은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않는 숙소로 인근에는 은행과 기차역, 주유소, 불법 주차 차량 보관소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토요일인 3월 3일 런던 워털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스크리팔이 거주하고 있던 솔즈베리로 향했다.

오후 2시 25분 솔즈베리에 도착한 이들은 2시간가량을 머문 뒤 4시 10분에 다시 솔즈베리를 떠났다.

CCTV 화면에는 이들이 솔즈베리 역에서 출발 안내 전광판을 보는 모습이 찍혔다.

다음날인 3월 4일 이들은 전날과 동일하게 오전 8시 5분 워털루 역에서 기차를 타고 11시 48분 솔즈베리역에 도착했다.

페트로프는 회색 백팩을 맸는데, 여기에 '노비촉'이 든 향수병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솔즈베리역에서 1마일(약 1.6km)가량 떨어진 스크리팔의 자택까지 걸어가는 모습 역시 CCTV에 기록됐다.

이후 이들은 스크리팔의 자택 현관문에 노비촉을 바르거나 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다시 오후 1시 5분께 솔즈베리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이들은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고, 페트로프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 경찰은 이미 노비촉이 든 향수병을 개봉해 공항 검색대에서 들킬 위험이 있는 만큼 페트로프와 보쉬로프가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를 버렸고, 영국인 커플 찰리 롤리(45)와 던 스터지스(44) 커플이 몇 달 뒤 이를 우연히 입수했다가 노비촉에 중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오후 1시 50분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런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솔즈베리역에 도착했는데, 이때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야(33)는 이미 노비촉에 중독돼 솔즈베리 쇼핑몰 인근 공원 벤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상태였다.



가디언은 이때까지만 해도 GRU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하는듯 했지만 실제로는 실패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우선 페트로프와 보쉬로프가 머물던 런던의 호텔에서 아주 작은 양이기는 하지만 노비촉의 흔적이 발견됐다. 이는 이들을 용의자로 특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당초 목표했던 것과 달리 스크리팔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회복해 현재 영국 정부의 보호 아래에 있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는 마지막으로 이날 오후 7시 28분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는 모습이 찍혔다.

검은색 작은 케이스를 끌고 가던 페트로프의 다른 쪽 손에는 러시아 여권이 들려있었다.

영국 경찰은 이들의 여권은 진짜지만 이름은 가명이며, 이것이 러시아 정부나 정부 기관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아에로플로트 항공 비행기는 히스로 공항을 오후 10시 30분 출발했고, 페트로프와 보쉬로프가 다시 영국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페트로프와 보쉬로프의 진짜 이름, 이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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