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노 '반기'에 교황 측도 반격 나서…가톨릭 '보혁갈등' 격화
보수매체에 서한 "교황, 동성결혼 허가증 발부 거부한 美 법원서기 알고 만나"
교황청 전 대변인 "교황, '속았다'며 만남 주선한 비가노 질책"
(서울=연합뉴스) 박인영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가톨릭 고위 성직자가 저지른 성학대 의혹을 은폐하는 데 관여했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퇴위를 요구해온 현직 대주교가 갈수록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침묵하던 교황 측도 반박 성명을 내고 본격적인 반격을 시도하면서 가톨릭 내부의 '보혁 갈등'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청 전직 외교관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77) 대주교는 지난달 30일 보수 성향 가톨릭 매체 라이프사이트뉴스(LifeSiteNews)에 실린 공개서한에서 2015년 교황이 방미 중 동성결혼 허가를 거부한 미국의 법원 서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만나 그를 격려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교황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결혼 허가증 발급을 거부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미 켄터키 주 로완 카운티의 법원 서기 킴 데이비스와 남편 조 데이비스를 워싱턴DC의 교황청 대사관에서 15분가량 만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가톨릭의 전통적 교리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며 동성애자나 이혼한 이들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황이 데이비스를 만난 사실이 알려지자 일각에서는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교황은 워싱턴 주재 교황청 대사였던 비가노 대주교의 주선으로 데이비스가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 반대 움직임에 앞장선 상징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었다.
최근 NYT는 칠레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문을 폭로한 후안 카를로스 크루스가 지난 5월 교황과의 비공개 면담 당시 교황이 데이비스를 만났을 당시 그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크루스의 전언을 소개했다.
만남을 주선한 문제로 대사직에서 사실상 경질된 것으로 알려진 비가노 대주교는 크루스의 증언에 반박하듯 이번 서한에서 "크루스나 교황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분명한 것은 교황이 데이비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와 그의 측근들이 개인 알현을 승인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2015년 9월 23일 교황에게 데이비스가 어떤 사람인지 적은 메모를 전달했으며 교황청 국무총리 격인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추기경), 안젤로 베치우 국무장관(추기경), 폴 리처드 갤러거 외무장관(대주교) 등 교황의 측근들에게도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이튿날인 9월 24일 교황과 데이비스가 비공개로 만났으며 비가노 대주교는 당시 교황이 "데이비스를 자애롭게 안아주고 그의 용기에 감사하고 인내심을 갖고 나아가라고 격려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비가노 대주교는 지난 26일 가톨릭 보수 매체들에 11쪽 분량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어도어 매캐릭 전 미국 추기경의 성학대 의혹에 관해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제에 의한 아동 성학대에 '무관용' 원칙을 천명한 교황이 성학대 사건 은폐에 공모했다며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비가노의 일방적인 공세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교황청 측에서도 2일 그의 주장을 반박하며 반격에 나섰다.
AP통신에 따르면 페레리코 롬바르디 전 교황청 대변인과 교황청의 영문 대변인이었던 토머스 로시카 신부는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교황이 데이비스 개인 알현 당시 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비가노 대주교의 주장을 일축했다.
로시카 신부는 교황과 데이비스의 비공개 면담 이튿날 자신과 롬바르디 전 대변인이 비가노 대주교를 만나 나눈 대화를 자신이 수기로 받아적은 내용을 공개했다.
이 메모에 따르면 비가노 대주교는 당시 롬바르디 전 대변인과 로시카 신부에게 교황이 데이비스와의 면담에 관해 자신을 "속였다"는 점과 데이비스가 4번 결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며 질책했다고 전했다.
롬바르디 전 대변인도 성명에서 교황청 지도부가 교황과 데이비스와의 면담을 승인했으나 그러한 만남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부여될지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며 비가노를 비판했다.
이처럼 교황과 진보적 교황청 지도부를 겨냥한 비가노 대주교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진보적 성향의 교황 측과 그들이 가톨릭 교리와 전통을 훼손한다며 맞서는 가톨릭 내 보수파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혼한 이들에게도 성체 성사를 받는 길을 열어주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교황의 리더십에 그동안 가톨릭 보수파들은 눈살을 찌푸려왔으며 급기야 보수파 추기경 4명은 몇 년 전부터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기도 했다.
보수적 성향의 비가노 대주교는 사제에 의한 아동 성폭력이 동성애를 묵인하는 문화에서 비롯됐다며 가톨릭이 동성애에 강하게 반대할 것을 촉구해온 인물이다.
NYT는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청 및 미국 내 영향력 있는 가톨릭 보수파 인물들과 손잡고 매캐릭 전 미 추기경의 성추문을 이용해 교황과 그가 추진하는 사안들에 해를 끼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톨릭 내부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일선 교구에서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2일 도널드 월 미 추기경이 워싱턴DC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사제의 성추문과 교황에 관해 언급하는 도중에 브라이언 가필드라는 한 신도가 갑자기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런 해프닝에도 미사를 계속 집전한 월 추기경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주교로 재직할 당시 사제에 의한 아동 성추행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사 직후 가필드는 CNN에 "나는 그(월 추기경)가 괴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방어하는 말은 줄이고 자신의 결함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 여성 신도는 미사 내내 성가대석에서 월 추기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서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CNN은 전했다.
mong0716@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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